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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해여행] 김해의 상징적 문화유적 가락국의 시조대왕 수로왕릉
    나의 여행이야기/경상도 2015. 9. 14. 12:49



    김해의 상징적 문화유적 가락국의 시조인 수로왕릉



    경주에는 기원전 57년 박혁거세를 중심으로 진한 12개 부족을 통합한 신라가 있었고, 압록강 계루부에는 기원전 37년 주몽이 출현하여 다섯개 부족을 통합하고 고구려를 세웠고 하남 위례성에는 기원전 18년 온조가 나타나 마한 54부족을 통합하여 백제를 세웠습니다. 


    이들 3국은 각자 세력확장과 땅이 비옥하고 농산물이 풍부한 낙동강하류를 중심으로 집성하고 있었던 변한 잦아지자 이 자방의 부족장인 구간들이 왕을 내려보낸다는 하늘의 계시와 함께 알려준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그러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고 구지가(龜旨歌)를 부르면서 서기 42년 구지봉에 모여 대왕맞이를 기원하는 행사를 벌이니 하늘에서 금빛상자가 내려오고 그 안에는 6개의 황금알이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 알에서 태어난 6명의 사내아이 중 키가 9척이며 가장 먼저 태어난 아이를 가락국의 왕으로 추대하니 가장 먼저 알에서 태어났다 하여 수로(首露), 금합에 든 황금알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金)으로 하니 이는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왕이 된 것 입니다.


    그 이후 157년간 나라를 다스리다 서기 199년 세상을 떠나 이 곳에 묻혔다고 합니다. 사적 제73호 원형분토분이고 봉분의 높이는 약 5m에 이르며 1580년(선조13)에 경상도 관찰사 하엽이 수축하였고 1647년(인조5)에 '가락국 수로왕릉'이란 능비가 세워졌습니다.




    [홍문 (홍살문)]


    경상남도 김해시 서상동에 자리잡은 수로왕릉은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도굴을 당했다고 전해집니다. 당시 20세의 두여자가 함께 묻힌 흔적이 보이고 이는 순장했음을 가늠케 하는 흔적이라고 합니다. 1878년(고종15)에 수로왕의 신위를 모신 숭선전(崇善殿)의 현액을 내리고 침묘를 개축하여 김씨와 허씨 양성을 교대로 참봉을 맡게 하였답니다.





    홍문을 지나 신도를 따라 걸으면 보이는 가락루 이곳을 지나면 왼편으로는 순신각과 신도비각이 자리하고 있고 앞으로 숭전각이 있으며 정면으로는 수로왕릉으로 향하는 납릉정문이 있습니다. 2층 구조로 된 가락루는 누각형태가 릉에서 보기 힘든 구조물이라고 합니다.▲




    왕릉 앞의 납릉정문(納陵正門) 문설주에는 파사의 석탑을 가운데 두고 신어상(神漁像)이라 불리는 두마리의 물고기가 마주보는 문양이 새겨져 있고, 왕릉을 보고 왼쪽에 있는 신도비석의 이수에는 태양문(太陽紋)이 새겨져 있습니다. 쌍어문(雙魚文)이라고 불리는 문양과 태양문이 인도의 야요디야에서 흔히 보이는 것과 닮아 있어, 『삼국유사-가락국기』에 인도 아유타국의 허왕후가 파사석탑(婆娑石塔)을 배에 싣고 왔다고 전하는 것과 연결시켜 고대의 낭만적 상상력을 부채질하는 좋은 자료이기도 합니다.▲




    전하는 전설에 의하면 수로왕 무덤을 만들기 위해 땅을 파자 땅속에서 물이 솟아올라 작업을 중단하였다고 합니다. 이때 무척산 정상에 연못을 만들면 물길이 끊어질 것이라고 하여 무척산에 연못을 만드니 물이 끊어지고 지금도 무척산 정상에는 연못이 있다고 합니다. 납릉에는 정면에 비석이 세워져 있고 좌우에 문무인석이 배치되어 있고 그 아래에는 마양호석 역시 죄우에 나란히 배치되어 있습니다.▲




    신도비각은 가락사와 숭선전사가 기록된 비로 1885년(고종 22)에 3칸으로 창건되어 1926년과 1954년 두차례에 걸쳐 중수가 이루어졌고 1988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되면서 보수되었습니다.▲







    숭인문 안에는 숭선전과 안향각이 배치되 있고 문화재 보호를 위해 개방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숭선전은 가락국의 시조인 수로왕과 허왕후의 위패를 봉인하고 향화를 받드는 전각입니다.  안향각은 춘추대제전에 예조에서 보내온 향과 축을 봉안하는 곳이라고 합니다. ▲





    역대 가락국왕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숭안전 지금도 그 후손들은 능소에서 매년 음력 3월 15일과 9월 15일 두차례 제사를 크게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왕릉 뒤로 나가는 숲으로 된 작은 공원이 이어집니다.  잘 가꾸어진 공원은 마치 비밀의 정원으로 나가는 듯 한 기분이 들었고 초입의 아름드리 나무들은 왕릉을 보호하는 듯 신성한 느낌마저 들게 합니다.▲







    가야문화를 대표하는 쌍어문과 가야신화를 대표하는 천강난생신화인 6개의 황금알일 것 입니다. 쌍어문은 인도의 불교문화가 중국이 아닌 바로 허왕후를 따라 인도불교가 전해졌을 것이라는 남방불교설을 입증해주는 자료이고 하늘에서 부터 황금알이 내려 와 그곳에서 태어 나 왕이 되었다는 수로왕의 탄생신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곳 수로왕릉 공원에는 쌍어상과 천강육란석조상을 볼 수가 있는데 천강육란석조상은 원래 구지봉에 있다가 사적지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여 이곳으로 이전 하였다고 합니다. ▲





    철기문화를 보급하며 부를 축적했던 가야연맹의 찬란한 시절은 바로 해양을 이용한 넓은 교역이 바로 그 중심이었습니다. 고구려, 신라, 백제 보다 그 연맹이 늦게 결합되었지만 풍부한 곡창지대와 해상교역을 통한 신문물 도입, 그리고 철기제조의 탁월한 기술력까지 보유한 가야가 쇄망의 길은 걷게 된 것은 아마 여유로운 삶이 오히려 경계를 늦춰 노리고 있던 주변국가의 침략을 받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뭉치지 못하고 연맹이 각개격파 당하여 끝내 패망의 길로 접어들은 가야국 이제 그들은 역사속에서 자취를 감추고 그 기록조차 신라의 자료에서 어렵게 찾아봐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다시 재 조명되기 시작한 가야의 문화가 빛을 발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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