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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곡성여행] 눈으로 보는 것보다 정신적인 면이 더욱 소중한 곳 선종구산 선문 가운데 선종사찰인 태인사
    나의 여행이야기/전라도 2012. 4. 21. 07:00

     

     

     

     

     

     

     

     

     

    전라남도 곡성군 동리산 서쪽 능선에 자리잡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의 말사인 태안사..

    통일신라시대인 742년 신령스런 스님 세 분이 함께 대안사(大安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답니다. 이 때 산 이름을 동리산이라 하였는데, 산의 형상이 봉황과 같다 하여

    붙인 이름이랍니다. 봉황은 오동나무 열매만 먹는다 하므로 봉황과 같은 준걸인재들이 모두 이곳으로 모여들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또 절 이름이 대안사인 것은 세속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사람이 드물고, 계곡도 깊고 그윽하여 편안히 수도하기 좋은 곳이라는 뜻을 지닌다고 합니다.

     

    이후 9세기에 들어와 당시 선종의 위대한 인물이었던 혜철(惠哲) 선사가 중창하였는데, 이로부터 태안사는 선종사찰로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통일신라시대의 이른바 선종구산 선문 가운데 하나인 동리산파가 이곳에서 성립되게 됩니다. 따라서 태안사는 유적이나 유물처럼 눈에 보이는 것 보다는 정신적인 면이

    더욱 소중한 곳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혜철 선사의 부도는 지금 태안사 경내 위쪽 별도로 마련된 공간에 모셔져 있는데, 이 공간으로 들어서는 문의 이름이 배알문(拜謁門)인 것도 태안사에

    있어서 혜철 선사의 위치가 얼마만큼 높은 것인지 짐작하게 해 준다고 합니다.

     

     

     

    고려 태조 때(918-943) 광자 윤다(廣慈 允多)가 132칸의 건물을 짓고 대규모 절을 이룩하여 동리산파의 중심 도량으로 삼았답니다. 고려 초에는 송광사, 화엄사 등 전라남도 지역에

    있던 대부분의 절이 이 절의 말사였으나, 고려 중기에 송광사가 수선(修禪)의 본사로 독립됨에 따라 사세가 축소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명찰의 전통은 조선시대에도 계속 이어져

    세종대왕의 형 효령대군이 태안사를 원찰로 삼아 나라에서 인정하는 대찰이 될 수 있었습니다. 효령대군에 관련된 유적과  유물은 아직도 태안사에 전하고 있고. 그 뒤로도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의 중건을 이루면서 꾸준히 법등을 이어왔다고 합니다.

     

     

     

     

    1925년에는 최남선(崔南善)이 찾아와 "신라 이래의 이름 있는 절이요, 또 해동에 있어 선종의 절로 처음 생긴 곳이다. 아마도 고초(古初)의 신역(神域) 같다"고 극찬하기도 했습니다.

    1950년 6.25전쟁 때 대웅전을 비롯한 15채의 건물이 불에 탔고, 1985년 강청화(姜淸華)가 주석하면서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현존하는 건물은 대웅전을 비롯하여 보제루(普濟樓), 해회당(海會堂), 선원, 능파각(凌波閣;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2호), 일주문 등이 있고, 이 중 해회당은 네모꼴로 이어진

    큰 건물이고, 선원 역시 전국 굴지의 규모입니다. 대웅전은 6.25전쟁 때 불 탄 것을 1969년 재건했다고 합니다.

     

     

     

    6.25사변때 15채의 건물이 소실되었지만 능파각과 더불어 이 일주문만이 소실되지 않고 남았습니다.  이 일주문은 각현선사, 영월선사가 중수하였고, 1980년 보수되었다고 합니다.

    건축양식은 잔층 맞배집으로 전후 주칸에는 3구, 측면에는 1구의 공간포를 짜 올린 다포식 건물로 양서된 살미첨자들로 내외 사출목의 공포를 짜서 아주 화려한 건축물 형태를 갖추고 있습니다.

     

     

     

     

    태안사 광자대사비(보물 제275호) : 현재 비의 몸돌은 파괴되어 일부분만 남아 있으며, 새겨진 글자도 마모되어 판독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다만 <조선금석총람> <해동금속원>등의

    책자에 천문이 있어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고 합니다. 고려 초 태안사를 중창한 광자대사(864~945)의 비로 고려 제4대 광종 원년(950)에 세워졌답니다.  탑비의 내용은

    효공왕의 측근에서 불심에 대한 문답을 한 일과 고려 태조 왕건에게 극진한 대우를 받았음을 기록하고 있다고 합니다.

     

    귀부의 받침돌은 목이 짧으나 머리와 앞면의 생김새가 사실성을 띠고 있으며, 비석 받침대 면에는 소용돌이형의 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수(용머리)는 네모서리에 몸을 감고 있는 용의 머리가

    꾸며져 있고, 중앙에는 극락조로 보이는 새 모양이 새겨져 있습니다. 

     

    1941년 펴낸 사적기에 의하면 '1928년 중건 당시 광자대사비의 이수를 옮겨와 적인 선사비의 이수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어 적인선사탑비의 이수와 광자대사탑비의 이수가 바뀌었을

    가능성도 있다 합니다. 그러나 아직 확실치는 않으므로 앞으로의 연구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태안사 광자대사탑(보물 제274호)

     

    이 부도는 찰각원당형(八角圓堂型)이라는 신라 석조부도의 전형을 잘 보여 주는 것으로 탑의 기단부부터 옥계석과

    상륜부에 이르기까지 팔각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팔각 하대석 각면에는 당초문이 있고 그 위의 상단에는 각면의 안상(眼象:눈모양)2좌씩 배치되었습니다.

    그 위에 16엽의 이중 연꽃잎이 아래로 향하고 있고 그 위 중대석에 안상 1좌씩 있습니다.

    상대석 또한 팔각으로 16엽 연꽃잎을 두텁게 새겼으며, 이 상면에는 2단의 팔격형 받침이 있습니다.

    그 위에 난간을 모방한 1단을 마련하고 탑신을 받치고 있습니다. 탑신의 각면에는 탁상에 놓인 향로모양을 새겼고

    그 좌우로 사천왕 입상이 양각되었습니다.

     

    옥계석은 목조건축의 양식에 따라 기와골, 암막새, 숫막새까지 잘 나타내고 있고, 상륜부는 앙화(꽃부리가 위로 향한 모양),

    복발(반구형의 탑의 꼭대기층 위에 바리때를 엎은 것 처럼 만든 부분), 보륜(바퀴모양의 석재), 조부(구슬모양의 석재) 등이 있어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 부도는 상하 비례가 우아하고 정교하며 완전한 상륜부 조각 또한 매우 우수하다고 합니다.

     

     

     

     

    부도군을 지나 태안사 본당으로 향합니다.

    일주문을 지나 부도군을 둘러보는 시간도 꽤 걸렸습니다.

    뒤돌아보니 전나무 사이로 보이는 일주문이 왠지 쓸쓸해 보입니다.

     

     

     

     

     

    경내에 들어서니 눈앞에 대웅전이 보입니다..이제 곧 예불을 시작하나 봅니다..저희에게 정숙을 요하는 스님의 당부가 있었습니다.

    말 소리 죽여가며 조용조용 경내를 둘러봅니다.  예불중이라 법당 내부를 볼 수는 없지만 그곳에는 아미타삼존불을 모셨답니다.  그리고 이곳에도 보물이 한 점 있는데 그것은 바로 동종입니다.

    곡성 태안사 동종(보물 제1349호)은 2002년 보물로 승격되었다 합니다.  조선시대의 특징을 잘 보여주며 조각이 아름답고 부드럽다고 합니다.

    현재 국내 사찰에 있는 대부분의 동은 임진왜란 이후에 만들어진 것인데 이 종은 임진왜란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조선 초기 동종양식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서 가치가 크다고 합니다.

     

     

     

     

    해회당은 네모꼴로 이어진 큰 건물로서, 고흥 능가사(稜伽寺)에서 처음 봉인되었던 금고(金鼓)가 마루에 걸려 있었던 곳입니다.  지금은 요사로 쓰이고 있습니다.

     

    [해회당]

     

    [보제루]

     

     

    새로 청동대법종을 제작중인듯 합니다..

    다시 이곳을 방문할 즈음에는 이 종도 구경할 수가 있겠네요.

     

     

     

     

    대웅전 오른편에 따로 높은 이단의 축대를 만들어 조성한 대지에 위치한 건물로 근래에 새로 지은 건축물인 약사전이 보입니다.

    내부에는 불단위에 약사여래가 모셔져 있고 닫집은 만들어 지지 않았으며 그 뒤로 한폭의 유화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임창수화백이 그린 약사여래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전통 안료를 사용하지 않고 현대에 걸맞게 탱화를 번안해 그려 봉안한 그림으로 계속적인 전통의 고집이 아닌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맞춰 조화시키려고 한 일례라고 합니다.

     

     

     

     

     

     

     

    'ㄱ'자형 건물로 정면 6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인 선원입니다.  선원은 화두를 참구하시는 스님들이 수행하는 곳 입니다.

     

     

     

     

     

    태안사 적인선사 조륜청정탑(보물 제273호)

     

    이 탑은 태안사의 개산조사라 할 수 있는 혜철(慧徹)대사의 부도 입니다. 적인선사 혜철은 신라 원성왕 1년(785)에 테어나

    경문왕 1년(861)에 입적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부도는 적인선사가 졸아가신 861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부도는 현 태안사의 가장 높은 곳에 마련한 대지에 있으며, 부도 옆에 탑비가 부도를 바라보면서 위치하고 있습니다. 또한 부도 앞에는

    계단을 마련하고 배알문(拜謁門)이라는 현판을 단 문을 두어 부도가 놓인 대지의 격을 높이고 있습니다.

    부도는 지면에 바로 놓인 것이 아니라 기단을 마련한 위에 모셔졌습니다.

     

    기단은 원래 가구식으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우주가 제 위치에 있지 않는 등, 많은 부분이 교란되어 있습니다.

    또한 기단 주변으로 초석들이 위치하고 있어, 부도를 중심으로 한 부도전이 꾸며졌을 것으로도 추정된다고 합니다.

    기단 정면에 위치한 갑석의 형태가 특이하게 만들어져 있는데 이것은 계단을 설치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부도는 지대석 위에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으로 이루어진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탑신과 옥개석, 상륜부를 두어 만들었습니다.

    전체적으로 팔각형평면을 기본으로 구성한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부도 형식을 지니고 있답니다.

     

     

     

     

    이 탑은 신라말기에 건립되기 시작한 부도의 초기 작품으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그 형태에 있어서도 너무 화려하거나 너무 거대한 것과는 다르게, 전체적으로 안정적인

    조형적 형태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 조각에 있어서도 기품을 잃지 않고 있어, 수수하면서도 당당한 초기 한국 부도의 명작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적인선사조륜청정탑비

     

    적인선사조륜청정탑 옆에 부도를 바라보며 세워진 비석입니다. 훌륭한 선사의 부도에는 그의 일대기와 사상을 담은 탑비를 옆에 같이 세워두는 것이 일반적이며,

    이를 통해 그 당시의 역사와 시대 상황 및 선사의 일대기를 알 수 있습니다. 탑비는 귀부와 비신, 이수로 구성되는데 적인선사탑비는 비신이 결실되어 없어졌으며,

    현재 사내에 전해 내려오는 비문을 가지고 다시 복원해 놓았습니다.

     

    귀부는 당당하게 앞발을 들어 무거운 비신을 당당히 버티고 있는 모양으로 조각했고, 등에는 매우 가는 선으로 거북의 등껍질을 표현했고, 귀부의 등껍질은 다른 탑비의

    것과 다르게 끝부분을 단순히 원형으로 만 조각된 것이 아니라, 호형을 그리며 물결치듯이 마감되어 있어 독특하다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비좌에는 구름무늬가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고, 그 상부는 연꽃으로 조각했다. 또한 꼬리는 말아 올리지 않고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습니다.

     

    이수는 양편에 각각 2마리의 용이 구름을 사이에서 서로 등을 대고 있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고, 정면 한 중앙 두전(頭篆)에는 적인선사(寂忍禪師)라고 써넣었습니다.

    배면 정면과 유사한 모양을 보이고 있는데, 4마리의 용이 구름을 배경으로 조각되어 있다. 정상에는 보주를 얹어 마감했습니다.

     

     

     

     

     

     

     

     

     

    태안사 본 영역과 별도로 오른편에 따로 담장으로 구획된 영역을 만들고 이곳에 천불전 암자를 배치했습니다. 천불전 암자에는 천불전과 산왕각의 전각 건물과 하나의 요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암자의 중심건물이 천불전으로 정면 3간, 측면 2간의 평면을 갖고 있으며, 겹처마,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기단은 막돌허튼층쌓기를 이용해 만들었으며, 정면과 오른쪽 측면에 기단을 오를 수

    있는 계단을 만들었습니다. 초석 역시 막돌을 사용했으며, 기둥은 원통형 기둥을 사용했다. 공포는 1출목의 주심포식 건축이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 화반을 놓았습니다.

     

    가구는 무고주 5량의 가구를 적용하고, 내부 천장은 종보 이하는 연등천장을 만들었고, 종보 위로는 우물천장을 가설했습니다. 지붕은 맞배지붕 형태를 하고 있으며 측면에 커다란 풍판을 달았고,

    내부에는 “┏┓”형태로 불단을 조성했는데, 내부공간의 2/3 정도를 차지할 정도 거대하게 조성했으며, 배면으로 갈수록 높이를 높였습니다.

    이곳 중앙에 항마촉지인의 석가모니불을 모셨고, 그 외에 모든 불단은 작은 부처님 상으로 가득 메웠습니다.

     

     

     

     

     

    사찰은 사찰다워야 한다며 사찰에 오르는 길을 한결같이 포장을 마다하여 흙길로 이어지는 전통을 계속 이어가고 있으며 또한 재미잇는 것은 화장실로 이곳은 아직도 깊이가 깊은

    전통방식의 화장실이 유재되고 있습니다.  여성분들은 약간 무서움을 느낄정도로 깊은 모양의 화장실을 한번 체험해 보는 것도 좋은 추억이라 생각이 듭니다.

    수 많은 청원을 넣어 그 높이를 줄였다고는 하나 여전히 깊은 화장실이니 더욱 깊었던 화장실은 어떠했는 지 몹시 궁금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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