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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곡성여행] 태안사에서 시작해 태안사로 돌아온 "국토", "식칼론"의 시인 조태일시문학관을 가다
    문화리뷰/박물관·전시관 2012. 4. 20. 07:00

     

     

     

     

     

     

     

     

     

     

     

     

     

     

     

    국토 서시

                                                          

                                                                               조태일

     

    발바닥이 다 닳아 새 살이 돋도록 우리는

    우리의 땅을 밟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숨결이 다 타올라 새 숨결이 열리도록 우리는

    우리의 하늘 밑을 서성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야윈 팔다리일망정 한껏 휘저어

    슬픔도 기쁨도 한껏 가슴으로 맞대며 우리는

    우리의 가락 속을 거닐 수밖에 없는 일이다.

     

    버려진 땅에 돋아난 풀잎 하나에서부터

    조용히 발버둥치는 동맹이 하나에까지

    이름도 없이 빈 벌판 빈 하늘에 뿌려진

    저 혼에까지 저 숨결에까지 닿도록

     

    우리는 우리의 삶을 불 지필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숨결을 보탤 일이다.

    일렁이는 피와 다 닳아진 살결과

    혀연 뼈까지를 통째로 보탤 일이다.

     

    [국토] [1975]

     

    전남 곡성군 태안사에 가다보면 주차장입구에 조태일 시인의 시문학 기념관이 보입니다.

    1970년~80년대 강한 언어로 군사독재시절 폭압적 현실에 저항했던 그는  부패한 세상에 정면으로

    언어의 칼을 들이대며 순탄치 않은 삶을 보냈습니다.

     

    곡성 동리산 태안사 아랫마을에서 대처승이자 태안사 주지의 아들로 태어나 목탁소리와 독경소리를 들으며 자랐던 그는

    이곳 태안사가 그의 고향이고 문학활동의 시작점이자 귀착점이었던 것입니다.

     

     

     

     

    조태일 시문학기념관은 2003년 9월7일에 곡성군 주관으로 개관한 문학관입니다.  대지 5,558평방미터에 건축면적은 지상1층 지하1층의 245평방미터인

    "조태일 시문학기념관"과 지상1층 지하1층의 313평방미터인 "시집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조태일 시문학기념관"에는 조태일시인의 유품과 시인을 기리는 문학작품이 2,000여점이 전시되어 있고 "시집전시관"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시집인

    최남선의 "백팔번뇌", 최초의 번역시집인 "오뇌의 무도"등 희기본을 비롯하여 최근의 시집까지 약 3,000여점의 책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부대시설로는 "세미나실" 1실과  "창작실"4실이 있다고 합니다.

     

     

     

     

    조태일 시인은 1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1974년 고은, 황석영과 함께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창설을 주도하였으며, 민족문화작가회의 상임이사

    등을 역임한 시문단의 큰 시인이기도 한 그는 1979년 긴급조치 9호로 투옥된데 이어 1980년 5월에는 계엄해제 촉구 지식인 124명 서명에 참여하고

    계엄법과 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되는 등 70년대 유신독재에 정면으로 맞서는 등 군부독재에 저항한 문인중의 한사람 이기도 하였습니다.

     

     

     

     

     

    대한민국 목조건축대전 1회 본상 수상을 받기도 한 이 기념관은 천장을 창으로 구성해 놓아

    낮에는 자연빛으로 기념관 내부를 둘러볼 수 있게 하여 목재로 구성된 벽이 더욱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비춰

    전시물들을 보다 편하게 구경할 수가 있습니다.

     

     

     

     

     

    비록 그는 가고 없지만 그의 흔적과 그를 기리는 사람들은 이곳 기념관에

    아직도 그를 잡아두고 있습니다..

    술과 담배를 좋아했던 그의 모습들이 담긴 사진들 하고 그가 남긴 유품들이

    그를 추모하고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련한 추억들의 상징물들 이겠지요.

     

     

     

     

     

     

     

    살면서 남긴 수백편의 시보다 삶 자체가 강렬한 시였던 그는 99년 7월 간암 선고를 받은 후 "암세포도 내 몸의 일부이니 지나치게 미워하면 안 나간다.

    잘 타일러서 보내야 한다"며 말하고 또 한편으로는 "나 한사람 죽음은 수천사람의 소생일 수도 있거늘 나 한사람의 삶은 너무 넓게 차지해서 수천사람이

    비좁아 질 수 있거늘"...그렇게 그는 시를 쓰며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부패한 세상에 정면으로 언어의 칼을 들이대던 조태일 시인 당연히 순탄치 않은 삶을 보냈습니다.

    69~70년 월간 시 전문지 [시인]을 창간하여 1년여간 주재하였으나 당국의 압력으로 폐간, 75년 제3시집 [국토] 긴급조치

    9호로 판매금지, 77년 양성우 시집 [겨울공화국] 발간 사건으로 투옥, 79년 자택 옥상에서 유신독재 비판 연설로 투옥,

    81년 평론집 [고여있는 시와 움직이는 시] 판매금지, 83년 제4시집 [가거도] 판매금지..

     

    그에게 자주 쓰이는 단어는 투옥과, 판매금지등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천성은 투사와는 거리가 멀었답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며, 그 속에 스며있는 생명들의 목소리에 눈물 흘리는 유약한 사람이었답니다.

    세상에 대한 사랑이 그를 그렇게 강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풀씨가 날아다니다 멈추는 곳/그곳이 나의 고향/그곳에 묻히리//햋볕 하염없이 뛰노는 언배기면 어떻고/

    소나기 쏜살같이 꽃히는 시냇가면 어떠리/온갖 짐승 제멋에 뛰노는 산속이면 어떻고/노오란 미꾸라지 꾸물대는

    진흙밭이면 어떠리//풀씨가 날아다니다/멈출 곳 없이 언제까지나 떠다니는 길목/

    그고시 나의 고향/그곳에 묻히리

     

    - 조태일 시 "풀씨" 전문 -

     

     

     

     

     

     

     

    모든 목소리들 죽은 듯 잠든/전남 곡성군 죽곡면 원달1리/九山의 하나인 桐裡山의 중으로/서른다섯 나이에 열일곱 나이 처녀를 얻어//

    깊은 산골의 바람이나 구름/멧돼지나 노루 사슴 곰 따위/혹은 호랑이 이리 날짐승과 함께/오손도손 놀며 살아가라고/칠남매를 낳으시고//

    난세를 느꼈는지/산 넘고 물 건너 마을 돌며/젊은이들 모아 夜學하시느라/처자식 돌보지않고//여순사건 때는/죽을 고비 수십 번 넘기시더니/

    땅뙈기 세간 고스란히 놓아둔 채/처자식 주렁주렁 달고/새벽에 고향을 버리시던 아버지.//삼십년 떠돌다/고향 찾아드니 아버지 모습이며 음성/

    동리산에 가득한 듯하나//눈에 들어오는 것/폐허뿐이네 적막뿐이네.  [원달리 아버지]

     

    나라가 위태로웠던 칠십년대 말쯤/아내와 어리디어린 세 아이들을 데리고/고향 떠난 지 삼십년 만에/내가 태어났던 태안사를 찾았다.  <중략>

    그리고 두 번째로/임신년 겨울./팔심을 바라보는 어머님을 모시고/아내와 이제 웬만큼 자란 아이들을 데리고/터벅터벅 태안사를 찾았을 땐/

    백골이 진토된/증조부와 조부와 아버님이/청화 큰 스님이랑 함께/껄껄껄 웃으시며 우리들을 맞았다.  [태안사 가는 길 1]

     

    아버님의 유언 "나 죽고 나면 30년이 지난 다음에야 고향 땅을 다시 찾으라" 7남매 중 넷째였던 그에게만 남겨진 유언..

    왜 그런 유언을 자신에게 남겼는 지 평생 그 이유를 모르고 살았던 그는 끝까지 그 이유를 모른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던 그 시절...아들을 아들이라고 말하지 못했던 그 시절..

    30년이 지난 후 이곳을 다시 찾으면 그 당시 그 내용을 알고 있던 사람들도 이미 세상을 떠나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없으리라는 생각이었을까?

    그 이유는 저도 알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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