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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주여행] 백제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곳 공주박물관 2부 충청남도 고대문화실
    문화리뷰/박물관·전시관 2012. 3. 4. 07:30

     

     

     

     

     

    충청남도 고대문화실에서는 백제웅진시기를 전후한 이지역의 주거, 무덤, 성곽, 대외교류 관련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공주 송산리 고분군과

    공산성 출토유물을 전시하여 웅진백제시기 백제왕실과 귀족의 문화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구석기시대부터 신석기시대, 철기시대를 거쳐 마한과 백제(기원전 18~660)의 웅진, 사비시대를 중심지로 역활을 한 뒤 통일신라시대로 이어지는

    충청남도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공간입니다.

     

     

     

     

     

     

     [빗살무늬토기 서산 대죽리 신석기시대(기원전 1500년 경)]

     

     

     

     

    빗살무늬토기(아산 성내리 신석기시대(기원전 3500년 경)

    충남지역의 신석기시대 토기는 바닥이 계란모양처럼 뾰족한 빗살무늬토기와 바닥이 평평하고 몸이 구형이며 능형의 무늬를 연속적으로 시문한

    '금강식토기錦江式土器'가 대표적입니다.

     

     

     [대롱옥 청동기시대(기워전 6~5세기전)]

     

     [갈판, 갈돌 청동기시대(기원전 6~5세기경)]

     

     

    삼각형돌칼

    곡물을 수확하는데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중앙부의 구멍에 줄을 꿰어 손에 단단하게 감은 뒤 곡물포기를 베어내었습니다.

     

     [돌화살촉, 돌칼, 삼각형돌칼]

     

     

     

    철기시대에 사용된 청동검으로 몸통의 검이 좁아 '세형동검細刑銅劍', 혹은 주요 분포권이 한반도이기 때문에 '한국식동검韓國式銅劍'으로 불립니다.

    한국 철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로 몸통과 손잡이를 따로 만들어 부착하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대부분 돌덧널무덤[石槨墓],널무덤[木棺墓]에서 발견되며, 덧띠무늬토기, 검은간토기, 잔무늬거울[細紋鏡], 꺽창[銅戈]과 투겁창[銅矛] 등이 함께 출토됩니다.

     

     

     [붉은간토기(청동기시대 6~5세기), 겹입술토기(청동기시대 10~9세기)]

     

     [돌화살촉(청동기시대 기원전 20~7 세기경), 환산석부(청동기시대 기원전 10~7세기 경), 석검(청동기시대 기원전 10~7 세기 경),

    반달돌칼(청동기시대 기원전 9~7 세기 경)]

     

     

     

    마한과 소국의 발전

    기원전후부터 300년경까지는 백제, 신라, 고구려가 한반도의 남부와 북부에 존재했던 삼한, 부여, 옥저, 동예등의 소국을 통합하던 시기였습니다.

    이 당시 충남지역을 중심으로 존재하였던 마한은 54개국의 소국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4세기 초반까지 독자적인 세력과 문화를 유지하였답니다.

    이 시기에는 철기의 제작과 이용이 보편화되면서 청동기가 점차 소멸하여, 중국의 제작기법에 영향을 받아 물레를 사용하여 성형하고 밀폐된 가마에서

    구워낸 연질토기가 출토되었답니다.

     

     

     

    표주박형단지

     

    단지 2개를 상하로 접합시킨 담회색 용기입니다. 윗부분의 단지는 짧은 목에 둥근 몸체이며, 두드린 문양이 아랫부분까지 수직방향으로 있습니다.

    넓게 벌어진 입술부분은 회전물손질로 정리되어있습니다. 입술부분과 어깨부분은 심하게 찌그러져 있고, 아랫부분의 단지는 상하로 눌린 형태의 원형이며,

    어깨 일부에는 기포가 함께 찌그러져있습니다. 표면은 가는 선 문양으로 두드린 후에 시계방향으로 선을 돌려내었고, 몸체 중간 아래로는 두드린 문양이

    불규칙하게 되어있습니다. 단단한 재질이며, 바탕흙에는 모래알갱이가 섞여 있으나 비교적 고운 편입니다.

     

     

     

     

    검은간 토기

     

    백제토기로서 가장 특징적인 것 중의 하나인 검은간토기로, 몸 전체가 검정색이며 표면을 곱게 갈아내어 윤이 납니다.

    형태는 곧은 입에 짧은 목을 지닌 항아리로 뚜껑이나 몸체의 어깨 부분에 문양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을 가진 흑색마연토기는

    일반적인 용도의 토기라기 보다는 특수한 목적을 지닌 위세품(권력을 상징해 주는 물건)으로 판단됩니다. 이것이 출토된 유구는 그 지역에서 가장 상급에

    해당하는 것으로 지배집단에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분포지역은 한강에서 천안까지로 한성백제의 세력범위와 일치하고 있으며, 중국제 청자의 분포범위와 대체적으로 유사합니다.

    이 토기는 납작한 바닥이 자른 듯이 수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몸체의 최대 지름을 중간의 위쪽에 두어 넓은 어깨부분을 표현하였습니다.

    어깨의 상단에 곧고 짧은 목을 만들었습니다. 토기의 표면은 흑색으로 표면에 갈아낸 흔적이 역력하게 남아 있고, 다시 표면에 마치 유약을 입힌 것처럼

    광택이 있는 검은 칠이 남아 있어 표면이 반질반질하게 윤이 납니다. 어깨부분에는 날카로운 도구로 줄무늬와 삼각무늬 등을 새겨 넣었습니다.

     

     

     

     

     

    고리자루 칼과 은새김고리자루큰칼

     

    위, 아래)) 고리자루칼이란?

    둥근고리 모양의 손잡이를 가진 큰 칼로, 주로 무덤에 매납되어 권력자임을 나타내는 위세품(권위를 상징하는 물건)에 속합니다.

    이 칼은 둥근고리 안쪽의 문양에 따라서 신분의 등급을 나타내는데 봉황이나 용문양이 있는 것이 최고의 신분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중간) 은새김고리자루큰칼이란?

    둥근고리 모양의 손잡이를 가진 큰 칼로, 주로 무덤에 매납되어 권력자임을 나타내는 위세품(권위를 상징하는 물건)에 속합니다.

    이 칼은 둥근고리 안쪽의 문양에 따라서 신분의 등급을 나타내는데 봉황이나 용문양이 있는 것이 최고의 신분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칼은 둥근고리의 안쪽에는 문양장식이 없으나, 손잡이 부분에 철판을 감고 은상감으로 풀문양을 장식한 것입니다.

    칼의 표면에는 칼집의 흔적으로 보이는 나무가 덮여 있습니다.

     

     

     

    금제 귀걸이

     

    귀걸이는 고대로부터 남녀 공용으로 사용된 장식품이었습니다. 백제의 귀걸이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양식을 충실히 따르며, 중심 고리가 얇은 것이 특징으로 도읍의 변천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귀걸이는 금봉을 꼬아서 만든 중심 고리와 이에 연결된 드림장식을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드림장식은 중심 고리에 가는 금실 2개를 말아 연결 고리로 삼고, 그 아래에 원형 방울형상의 장식을 매달았습니다.

    그리고 이 방울에서 5개의 고리를 만든고, 아랫부분에 장식으로 금판을 달았습니다.

     

     

     [쇠낫(백제 3~4세기경), 큰칼(백제 5~6세기경)]

     

     

    허리띠장식

     

    허리띠는 장식된 장품의 재질에 따라 옥, 금, 은 등 매우 다양합니다. 초기의 허리띠는 금판을 오린 약한 것으로 의식적인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삼국시대의 허리띠는 신분상의 등급에 따라 재료, 색, 수량을 달리하여 등급표시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삼국의 것이 비슷하여

    각 나라 간에 문화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허리띠 장식은 송산리고분군에서 출토된 것으로 네모꼴의 청동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청동의 허리띠 장식에는 귀신의 얼굴문양이 새겨진 것과 점으로 가장자리를 장식한 것이 있습니다.

    또한 허리띠를 고정시키는 고리 부분과 천 또는 가죽으로 된 띠의 끝에 달았던 부분도 함께 출토되었습니다.

     

     

     

     

    공주 수촌리 유적

     

    공주 수촌리 백제 고분군은 공주시에서 북쪽으로 10km 떨어진 작은 구릉의 서쪽 사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철기시대의 무덤부터 한성백제시기의 널무덤,

    돌덧널무덤, 굴식돌방무덤과 같은 다양한 형태의 무덤이 확인되었습니다.  무덤안에서 당시 공주지역 최고 세력가들이 사용하였던 금동관모와 금동신발,

    귀걸이, 각종 말갖춤과 무기류, 토기류 등 화려한 백제 유물과 중국제 도자기들이 대량으로 출토되었습니다. 

     

    수촌리 유적은 한성백제의 중앙정부가 지방을 간적접으로 통치하고 있던 모습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유적으로, 4~5세기 충남지역의 지방세력이

    백제와의 관계를 강화하며 점차 백제의 중앙귀족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살펴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세발토기

     

    세발토기는 백제에서만 출토되는 특징적인 형태의 그릇으로 접시의 그릇에 다리가 세 개 달린 형태의 그릇을 말하며 뚜껑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이 토기는 백제의 수도 변천에 따라 모양이 변하는 특징이 있으며, 형태가 특이해서 제사와 같은 행사나 무덤에 매납하는 용도로 알려졌으나 최근 집 자리에서 출토되는 예가 증가하여 일반적으로 이용되었던 그릇으로 생각됩니다. 이 세발토기는 다른 세발토기보다 크기가 크고 모양이 다른 것이 특징으로 중국의 청동솥과 유사한 형태입니다. 접시는 둥근형태이며, 뚜껑을 받칠 수 있는 받침턱이 있습니다. 뚜껑에는 꼭지가 붙어 있습니다.

     

     

     

    흑유닭모양항아리

     

    닭모양주전자는 넓은 입술을 갖은 단지의 어깨 부분에 닭모양의 주구(注口)와 손잡이를 붙인 형태로 일명 천계형주자라고도 합니다.

    중국에서는 서진, 동진대부터 남조대에 걸쳐 많이 사용되다가 수당시기에는 그 수량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그 형태가 동진시기까지 몸체가

    둥근 구형(球形)이 중심을 이루다가 남조에 들어서면서는 목이 길어지는 등 실용적인 기형으로 변해간다고 합니다.

    이 흑유 계수호는 동진시기의 특성을 잘 반영하고 있으므로 중국 동진에서 제작되어 백제로 전해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좌) 중국 동진제의 흑유 계수호로 입부분 일부 파손되었습니다. 납작 바닥에 납작한 몸체, 좁은 목을 수직으로 뽑고, 입술부를 넓게 만들었습니다.

    몸체의 어깨부분에 두 개의 꼭지, 하나의 닭머리, 그리고 닭머리의 반대에는 손잡이를 부착한 것인데, 닭머리와 손잡이 꼭지가 대각으로 위치합니다.

    표면의 유약은 매우 두텁고 고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입술부분에 닭머리 및 손잡이는 유약이 얇게 칠해져있어 녹색이 도는 흑갈색으로 나타나고,

    이외의 부분은 갈색이 도는 흑색 입니다. 바닥은 유약이 입혀지지 않았습니다.

     

    우) 몸체의 중간부분이 넓은 항아리로, 입술부는 넓게 만들어 졌습니다. 전체적으로 흑갈색의 유약이 입혀졌는데 하단부는 적갈색을 띱니다. 어깨에는

    두개의 귀와 닭머리를 부착하였습니다. 닭머리는 매우 섬세하게 표현되었습니다.

     

     

     [발걸이와 재갈]

     

    금동제관모

     

    수촌리 유적의 금동제관모는 역U자형의 관을 중심으로 앞, 뒤쪽에 장식판을 붙인 뒤 상부에 대롱모양의 장식을 달았습니다.

    장식무늬는 용무늬[龍紋]를 중심으로 하여 화염무늬[火焰紋], 구름무늬[雲紋], 풀무늬[唐草紋] 등이 사용되었습니다.

    뚫고, 자르고 눌러내는 공예기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하여 장식하였으며 관모의 앞, 뒤쪽에는 지름 0.5cm 정도의 달개를 많이 달았습니다.

    최근 충남 서산, 전북 고창, 전남 고흥 등지에서도 수촌리 유적 출토품과 유사한 금동관모와 신발이 새롭게 발견되고 있습니다.

     

    금동제신발

     

    삼국시대에 등장하는 금동신발은 무덤에 묻힌 주인공의 권위와 위세를 나타내는 것으로 주로 왕릉이나 또는 이에 버금가는 지배자의 무덤에서

    출토되었습니다. 그동안 백제지역에서 조사된 금동신발은 바닥에 금동못이 박히고 표면에는 철자무늬, 마름모꼴무늬, 거북등무늬, 연꽃무늬, 용무늬,

    인동당초무늬, 물고기무늬 등의 다양한 무늬가 표현되었습니다. 수촌리 출토품에는 초화문 또는 용봉문의 추상적인 문양이 시문되었습니다.

     

     

     [금동제허리띠꾸미개(백제 4~5세기경)]

     

     

    수막새

     

    재래식 기와지붕의 처마 끝을 꾸미는 수키와, 또는 그 수키와 끝에 달린 무늬가 새겨진 부분을 말합니다.

    연꽃무늬수막새[蓮花文瓦當] 수막새에서 주로 사용되는 문양으로 꽃잎의 끝이 매우 들려있으며, 꽃잎 주변으로 막새의 테두리가 비교적 높고

    넓은 것이 특징입니다. 수막새에 붙여져 있는 수키와는 문양이 없으며 색이나 바탕흙은 수막새와 동일합니다. 붉은 색이며 무르게 구워진 것입니다.

     

    [위) 연꽃무늬전돌, 아래) 연꽃무늬수막새]

     

     

     

    송산리 6호분의 널길을 막은 벽돌로 긴 변에는 "梁官以爲師矣"라는 명문이 예리한 공구로 초서체로 새겨져 있습니다.

    명문의 내용은 중국 양나라의 국가에서 운영하는 공방의 기와 (또는 벽돌)을 본보기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백제에서 기와 또는 벽돌을 만들 때

    중국 양나라의 영향을 받았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또한 짧은 변에는 여덟 잎으로 된 연꽃이 돋을새김으로 되어 있으며, 넓은 면에는 돗자리무늬가 있습니다. 그러나 송산리 6호분에 이용된 벽돌이 오수전문양의 벽돌로, 이 벽돌과는 차이가 있으며, 오히려 무령왕릉을 쌓은 벽돌과 문양이 같은 것으로 보아 무령왕릉의 벽돌과 같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왕희도와 번객입조도

     

    당염립본왕회도(唐閻立本王會圖)와 오대남당고덕겸모양원제번객입조도(五代南唐顧德謙梁元帝番客入朝圖)는 대만 국립고궁박물원 소장품으로

    중국 남조의 양나라때 작품인 '양직공도(梁職貢圖)'의 모사본으로 추정된답니다. 

    '당염립본왕희도(일명 왕희도)'는 7세기 초, '오대남당고덕겸모양원제번객입조도(일명 번객입조도)'는 10세기 초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합니다. 

    중국 국가박물관 소장의 '양직공도'에 백제 사신만 남아있는 방면, 이들 그림에는 고구려와 신라의 사신들이 그려져 있어 삼국인들의 용모와 북식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3점의 그림에 그려진 사신들의 모습이 매우 다르고, 관련 국가에 대한 기록이 없어 동일한 작품의

    모사본이 아닐 가능성이 크므로 향후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방대한 자료들로 하여금 토탈 1, 2부로 나누어서 글을 올렸으나 가장 좋은 것은 직접 찾아가 하나하나 살펴봄이

    가장 좋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쉽게 찾을 수 없는 백제의 문명과 생활 그리고 그들의 섬세한 작품들을 둘러보면

    아름다운 백제문화의 보기 드문 예술품들을 감상하실 수가 있습니다.

    공주를 방문 하실때는 필히 이곳 국립공주박물관을 들려보시라고 강력히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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