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공주여행] 백제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곳 공주박물관 1부 무령왕릉실 무령왕의 혼이 살아숨쉬는 곳
    문화리뷰/박물관·전시관 2012. 3. 4. 07:00

     

     

     

     

     

     

    백제문화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곳이 흔하지 않습니다.  1200여년간 사람의 손을 타지 않고 고스란히 후손들에게 백제의 아름다움을 전할 수 있었던

    무령왕릉에서 발굴 된 108종 4,687점의 아름다운 유물들을 이곳 공주 박물관에서 감상할 수가 있습니다.

    국립공주박물관은 총 2개의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는데 제 1전시실은 무령왕릉실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2전시실에서는 충청남도의 고대문화실로 백제웅진시대 전후의 관련자료들을 전시합니다.  자료가 방대해 총 2부로 나눠서 기재합니다.

     

    제 1부 무령왕릉

     

    삼국시대의 왕릉 중 무덤의 주인공이 유일하게 확인된 왕릉으로 무령왕릉의 발굴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흔치 않는 백제의 아름다운 문명들을 감상할 수 있는 곳으로

    섬세하며 화려한 백제의 멋진 작품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또한 야외에는 공주 일원에서 발견된 석조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백제 성왕5년(527)때 세워진 대통사지에서 발견된 석조(石槽)나 서혈사지의 석불좌상과 석탑등

    다양한 석조유물들이 국립공주박물관 마당에 전시되어져 있습니다.

     

     

     

     

     

    무령왕릉실 들어서는 입구에 전시된 백자병으로 순천박씨 판관공파 박견원의 묘를 이장하던 중에 목곽 바깥에서 발견된 백자병입니다.  출토당시 백자병 구연부에 박자잔이 덮여 있는

    상태로 출토되었답니다.  문양이 전혀 없는 순백자 구연부는 나팔모양으로 벌어지고 동체는 하단부가 넓게 퍼져 15~16세기의 단아하고 안정된 백자병의 전형적인 형태를 보여준답니다.

     

    15~16세기 백자의 표준형을 보여주는 것으로 조선전기 백자연구에 있어 중요한 유몰로 파악되며 성리학의 지극히 현실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면이 가장 잘 나타나는 대표적인 유믈로,

    번잡한 문양과 장식이 억제되고 기형에 있어서는 안정성과 실용적인 면이 강하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제1전시실입니다..이곳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해 놓고 있고 이곳은 왕과 왕비의 목관 복원품과 유품, 그리고 각종 장신구및 금속옹기및 도자기, 동탁은잔 등을 순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들어서자 마자 무령왕릉의 발굴과정과 발견된 사유등이 사진과 함께 게시되고 있어 발견 당시 흥분하였을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리는 듯 합니다.

     

     

     

     

     

    무령왕릉에 대한 이야기들을 가까이서 잡아봅니다.  한글과 영어 그리고 일본어와 중국어등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석수(국보 제162호)

    무령왕릉을 지키고 있었던 진묘수(석수)입니다. 진묘수는 기괴한 신수를 표현한 공상적인 동물을 무덤 안이나 앞에 놓아서 악귀를 쫓아 사자(死者)를 수호한다는 중국의 묘장풍습에서 유래된 것으로

    그당시 백제는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출토당시 무령왕릉 널길 중앙에 밖을 향하여 놓여 있었답니다.

     

    진묘수는 뭉뚝한 입을 벌리고 있고 코는 크지만 콧구멍이 없습니다. 등에는 네 개의 융기(隆起)가 있고 머리 위 융기 상면의 패어진 홈에는 나뭇가지 모양의 철제 뿔이 꽂혀 있고 몸통 좌우에는 앞뒤로 날개모양의 갈기가 도안처럼 부조되었습니다. 네 개의 짧은 다리가 있으며 발톱이 표현되어 있는데 뚜렷하지는 않습니다.

     

     

     

     

    무령왕과 왕비의 목관 모형품입니다.

     

    무령왕, 왕비의 목관은 모두 5cm 두께로 잘 다듬은 판재를 짜 맞추어 상자모양의 관을 만들고 그 위에 여러 장의 판재를 짜 맞춘 뚜껑을 덮어 마치 맞배지붕의 가옥처럼 만들었습니다. 목관 판재의 안팎에는 두텁게 옻칠을 하고 관고리와 관못에도 은꽃으로 장식하여 그 품격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왕, 왕비의 목관 모두 홈을 파서 결합하고 못의 모양이나 장식 그리고 관을 운반하기 위한 관고리가 모두 같아 기본적으로 같은 구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왕의 목관이 5장의 판재 뚜껑을 짜 맞춘데 비하여 왕비의 목관은 보다 넓은 판재 3장으로 짜 맞춘 점에서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한편 목관의 뚜껑과 측판의 안에는 금박이 입혀진 작은 청동 못들이 각각 3열,1열씩 박혀 있어 관내부에 비단과 같은 천을 붙였음을 짐작케 합니다. 이와 같은 목관은 무령왕릉보다 약간 늦은 시기의 무덤인 익산 쌍릉에서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관못이나 관고리 장식이 같은 점 이외에, 머리 쪽이 넓고 발쪽이 좁으며 한 장의 판재로 만든 뚜껑 등은 낙랑의 목관에 많이 보입니다. 따라서 무령왕릉의 목관은 무령왕릉 목관만이 지니는 독특한 구조로 된 목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관 재질은 금송으로 일본고유의 품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금송의 재질 또한 매우 튼튼해서 일본내에서도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던 나무관의 재료라 합니다.

    당시 왜의 대화정권(大和政權)에 큰 영향력을 미쳤던 백제는 긴밀한 외교관계를 바탕으로 금송과 같은 좋은 품질의 목재를 왜로부터 공급받았을 것이라 합니다.

     

     

    [무늬있는 벽돌]

     

     

     

    나무관에서 발견된 청동못과 꽃모양 은장식입니다. 이들의 발견위치로 보아 나무관을 장식했던 것으로 보이며 실제 나무관의 뚜껑과 옆면 안쪽에는 금박이 입혀진 작은 청동못이 한줄, 혹은 세줄씩

    박혀있어 관을 장식하는데 이 꽃모양 은장식이 쓰였던 것임을 알 수가 있다고 합니다.

     

     

     

     

    베개(왕비)(국보 제164호)

    나무토막을 역 사다리꼴 모양으로 다듬고 윗부분을 U자형으로 파낸 다음 전면에 붉은 칠을 하였습니다. 가장자리를 따라가며 금박으로 테두리선을 돌린 다음 그 안에 같은 금박으로

    육각형의 거북등무늬를 연속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육각형 안에는 흰색, 붉은색, 검은색의 안료로 비천(飛天), 새 그림, 어룡(魚龍), 연꽃, 인동(忍冬),네이파리꽃 등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베개의 윗부분에는 나무로 조각하여 만든 두 마리의 봉황을 서로 마주보게 붙였습니다.

    이 봉황의 부리와 귀의 일부분에 금박을 띠처럼 돌렸습니다. 입안에 는 청동막대를 박았으며, 봉황 밑에는 '甲·乙'자(字)가 붓글씨로 씌어 있습니다.

     

     

     

    왕비의 발받침

    크기와 바탕색은 베개와 비슷합니다. 전면에 붉은 칠을 하고 가장자리를 따라가며 금박으로 테두리를 돌린 다음 그 안에 검은색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림은 앞뒷면에 모두 그려져 있는데, 연꽃무늬와 구름무늬 등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윗부분의 좌우에는 철막대가 박혀 있고 이를 중심으로 연꽃무늬가 그려져 있습니다.

    철막대에는 금제릉형장식이 붙어 있는데, 대나무를 형상화한 것으로 보입니다.

    베게는 이해한다고 하지만 요즘 시대에도 생각치 않았던 발받침을 이시기에 썼다는 것이 무척 놀랐습니다.  당시의 섬세한 그들의 정서가 보이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발받침(왕)(국보 제165호)

    왕의 베개와 발받침은 모두 커다란 나무둥치를 역 사다리꼴 모양으로 다듬고 그 가운데 부분을 "U"와 "W"자 모양으로 파내어 각각 머리와 두 발이 올려질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표면에는 검은 칠을 두껍게 한 다음 6각형의 거북등무늬와 금꽃으로 장식하여 화려함을 더하였습니다. 왕·왕비의 베개·발받침은 각각 검은색과 붉은색을 띠어 대조를 이룹니다.

     

     

     

    금제귀걸이(왕)(국보 제156호)

    왕의 귀걸이는 하나의 중심 고리에 작은 고리 2개를 연결고리로 하여 두 줄의 귀걸이를 매달았습니다.

    큰 귀걸이의 중간 장식은 2개의 원통체를 대칭되게 연결하였고, 원통체의 끝에는 금실과 금 알갱이로 장식한 심엽형 장식이 달려있습니다.

    끝 장식은 큰 심엽형 장식을 중심으로 작은 심엽형 장식 2개를 대칭되게 매달았습니다. 작은 귀걸이의 중간 장식은 금 알갱이를 붙여 만든 투작구체 5개를 '0-0'모양의 고리로 연결하였습니다.

    끝 장식은 담녹색 곡옥에 누금수법 장식이 가미된 금 모자를 씌운 것으로 금 모자에 좌우대칭으로 2개의 심엽형 장식이 달려 있습니다.

    이와 비교할 수 있는 귀걸이가 경주의 금령총과 일본 구마모토 현의 에다후나야마 고분에서 출토된 바 있습니다.

     

     

     

    금제뒤꽃이(왕)(국보 제159호)

    머리 부분에 있는 청동거울 위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몸체부와 꽂이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날개를 펴고 나는 새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몸체 윗부분에는 두개의 화문(花文)을 두드려 내고 아래쪽은 인동당초문(忍冬唐草文)을 새겼습니다. 뒤꽂이는 머리에 꽂아 머리모양을 흐트러지지 않게 해주는 실용적인 기능과 함께

    뒤꽃이 자체의 장식으로 머리를 더욱 화려하게 꾸며주는 장식적인 용도를 함께 가진 장신구입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목걸이의 주재료가 지금까지 알려진 ‘탄목(炭木)’이 아닌 ‘흑옥(黑玉)’으로 밝혀져 주목되고 있습니다.

    국립공주박물관은 무령왕릉 발굴 40주년 기념 특별전 '무령왕릉을 격물(格物)하다(2011.10.8~ 2012.1.29)’ 준비를 위해 다양한 종류의 출토품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을 실시하였습니다.

    이번 분석을 통해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목걸이(頸飾), 동물모양장식(獸形佩飾), 대추모양옥(棗玉) 등에 사용된 재료가 지금까지 알려진 ‘탄목(炭木)’ 또는 ‘탄정(炭精)’이 아닌 ‘흑옥(黑玉)’이라는 보석으로 밝혀졌습니다.

     

    흑옥 혹은 제트(jet)는 식물이 물에 흘러 퇴적돼 토양의 압력을 받아 오랜 세월 동안 화석화 돼 만들어진 보석으로 높은 탄소함유량을 갖으며, 석탄의 일종이라 합니다.

    흑옥제 장식품(避邪物)은 액막이를 위해 만들어진 인류 역사상 최고로 오래된 보석 중 하나이라고 합니다.

    서양의 경우 석기시대 유적에서 동물조형의 흑옥이 발견됐고, 기원전 1세기 켈트족에 의해 고대 로마제국으로 흑옥이 전해졌으며, 주로 반지, 팔찌, 목걸이 등의 장식품에 사용됐다고 합니다.

    동양에서는 액막이용 흑옥제 장식품이 흔하지는 않지만 중국 요녕지방의 한대 무덤과 한반도 평양지역의 낙랑 무덤에서 주로 출토됐으나, 중국 남경 근처의 육조시대 무덤에서도 흑옥제 동물모양장식이 발견됐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무령왕릉에서는 무려 128점에 이르는 흑옥제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고 합니다. 단일 유적에서 이렇게 많은 수량이 출토된 예는 전 세계를 통틀어도 그 유례를 찾기가 쉽지 않은데,

    무령왕의 죽음을 애도했던 사람들이 흑옥제 목걸이나 동물모양의 장식 등을 무령왕의 몸에 패용함으로써 악귀를 물리치고 왕이 편하게 영면하기를 기원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흑옥 목걸이와 흑옥동물모형장식]

     

     

    고리자루칼(왕)은 주로 삼국시대 무덤에서 출토되는 것으로 최고의 신분을 나타내는 위세품이며 그 형태나 장식정도, 재질에 따라서 무덤에 묻힌 사람의 신분이나 지위의 차이를 나타냅니다.

    무령왕릉 출토 고리자루칼(왕)은 왕의 좌측에서 발견되었는데, 둥근 고리를 이루는 손잡이 끝장식 안에 하나의 용을 표현한 단룡문 고리자루칼(왕)입니다.

    환두부는 외부 원과 용 모양을 동시에 주조하여 도금한 금동제입니다.

     

     

     

     

    왕의 허리부위에서 2벌의 금속제 허리띠장식이 출토되었습니다. 1벌은 띠고리와 띠끝장식, 과판, 드리개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또 한 벌은 띠고리와 과판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모두 금과 은을 사용하여 만들었습니다. 드리개를 갖춘 허리띠: 띠고리는 버섯모양을 띠며 띠 연결부에는 7엽장식과 하트형 장식이 투조되어 있습니다.

    과판은 표면이 오목하게 패인 타원형금구로 크기에 따라 대, 소의 두 종류가 있는데 교대로 배열하였습니다. 띠 끝장식은 전체형태가 5각형에 가깝습니다.

    드리개는 금제 오각형판과 금제와 은제 타원형금구, 금구 사각형판, 두꺼비무늬를 투조하였고 장방형 은판에는 백호, 주작도를 끌로 새겼습니다. 귀면은 벽사의 의미를 지니고 있고,

    두꺼비무늬는 달의 상징이며, 백호와 주작의 표현은 사신도의 일부분으로 여겨집니다. 드리개와 띠 끝장식이 없는 허리띠: 금과 은을 사용하여 만들었는데, 띠고리의 띠 연결부에 남아 있는

    자색가죽으로 보아 전체를 가죽으로 만들고 그 위에 금속제 띠고리와 과판을 연결하였던 것 같습니다. 띠고리는 버섯모양이며 과판은 역 심엽형 장식에 물건을 매달 수 있는 둥근 고리를 붙였습니다. 역 심엽형 장식은 금판을 두드려 만들었는데, 네 개의 금 못을 끼워 혁대에 고정되게 하였습니다.

     

     

     

    금제관장식(왕)(국보 제154호)

    왕의 머리 부분에서 거의 포개어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얇은 금판에 인동당초문과 화염문 장식을 투조하였는데 문양의 좌우가 비대칭입니다. 줄기와 꽃에 지름이 5mm정도인 영락을 달았습니다. 영락은 둥글고 작은 원판이며 여기에 작은 구멍을 뚫어 금실로 꿰어 4~6회 꼬아 달았는데 모두 127개입니다. [구당서(舊唐書)]에‘(왕은) 검은 천으로 된 관에 금꽃을 장식하고…’라는

    기록을 근거로 왕이 평소 사용했던 비단모자의 좌우 혹은 전후에 꽂았던 장식품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금동제신발(왕)

    왕의 신발은 내측판, 외측판과 바닥판의 3판을 서로 붙여 만들었습니다. 각 판은 다시 안에 은판이 있고 그 밖에 금동판을 덧댄 것입니다.

    신발 속에는 3중의 포가 붙어 있고, 얇은 나무껍질이 함께 나왔는데 바닥에 깔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닥은 앞부분이 조금 들려 있고, 10개의 철못이 박혀 있는데 단면은 정사각형에 가까운

    사각추모양입니다. 내측판의 표면에는 전면에 거북등무늬가 구획되었는데, 그 안에는 꽃잎무늬를 장식하였습니다. 외측판 역시 거북등무늬가 타출되었는데, 내부에 꽃잎무늬와 더불어 봉황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금, 은으로 장식한 칼)

     

     

     

    금제아홉마디복걸이(왕비)(국보 제158호)

    모두 아홉 마디로 되어 있는 이 목걸이는 한 마디의 길이가 6cm정도인데 가운데가 가장 넓으며 6면으로 각저 있고 전체적으로 약간 휘었습니다.

    각 마디의 양끝은 끈처럼 가늘게 늘여서 걸기 위한 고리를 만들고 끝은 다시 몸체에 다섯 바퀴 정도 정교하게 감아서 마무리하였습니다.

    착용 고리는 금봉을 말아 만든 세환(細環)이며, 여기에 9절 중 양끝 마디의 고리를 걸어 연결하였습니다.

     

     

     

     

    금제귀걸이(왕비)(국보 제157호)

    모두 4쌍이 출토되었습니다. 머리 쪽에서 출토된 2쌍은 중심 고리, 중간 장식, 끝장식 등을 갖추었고, 발치 쪽에서 출토된 2쌍은 중심고리와 끝장식만 갖춘 것입니다.

    귀걸이1 : 노는 고리에 2점의 귀걸이를 매달아 만들었습니다. 길쭉한 귀걸이는 영락을 붙인 사슬모양 연결 금구에 탄환 모양의 끝장식을 매달았습니다.

    짧은 귀걸이는 중간 장식으로 투작 반 구체를 덮어씌운 담녹색 유리구슬을 사용하였고, 사슬형 금구에 사익형의 끝장식을 연결하였습니다.

    귀걸이2 : 왕비의 발치 북쪽에서 팔찌와 함께 출토되었습니다. 크기는 아주 작습니다. 중심 고리에 금실을 두 번 감은 다음 횡으로 두세 번 감아서 마무리 하였습니다.

    끝장식은 작은 원형 영락입니다.

     

     

    [글자있는 용장식 은팔찌]

     

     

     

    무령왕릉에서는 청자육이호 2점과 흑갈유장경사이병 1점 등 3점의 중국도자기가 출토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청자육이호 2점은 크기와 세부문양이 약간 다를 뿐 모두 푸른 기를 머금은 유약이 두껍게 발려 있는 청자로, 둥그스름한 어깨에 6개의 고리모양 귀가 달려 있고 몸체는 연화문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으며 바닥에는 낮은 굽이 부착되어 있는 등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뚜껑이 갖추어진 것도 있는데 뚜껑에도 연꽃잎을 방사상으로 배치하고 그 주위에 두 줄의 음각선을 새겨서 화려하게 장식하였습니다.

     

     

     

     

    오수전은 지석 위에 꾸러미로 놓여 있었으며 그 숫자는 90여개에 달합니다. 매지권(買地券)에는 이 돈으로 토지신(土地神)에게서 무덤 터를 산다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이 철제오수전은 양(梁)나라 무제(武帝)때 만든 것으로 523년 무령왕(武寧王)의 사망(死亡)에 즈음하여 양나라로부터 백제에 전해진 것입니다.

    오수전은 백제 초기 왕궁 터로 추정되는 풍납토성에서도 출토된 바 있어 백제 초기부터 유통되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은구슬과 색유리구슬]

     

     

     

    꽃모양 금장식으로 이는 날개가 있는 것과 없는 것 두가지이고 다시 크기에 따라 큰것과 작은 것으로 구별됩니다.  크기가 큰 것은 왕과 왕비의 머리와 허리부분에서 많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옷이나 천에 붙였던 장식으로 여겨진다고 합니다.  또한 소형의 꽃모양 금장식 가운데 꽃잎수가 여섯이면서 꽃잎 사이의 구멍이 두개인 꽃모양장식은 그 모양이 무령왕 베개와 발받침의 장식에

    쓰였던 것과 같다고 합니다.

     

     

     

    금제 사엽형장식

    왕비의 허리부에서, 2점 모두 표면을 위로 향한 채 서로 겹쳐 출토되었습니다. 중앙의 반구형 원좌 주위에 4개의 꽃잎이 서로 대칭되게 붙어 있는 모습입니다.

    꽃잎의 형태는 4단의 인동당초문입니다.

     

     

     

    거울(왕, 왕비)(국보 제161호)

    이 거울은 거울과 똑같은 문양을 새긴 틀에 동을 녹여 부어서 만든 것으로 가죽 끈이 끼워져 있는 거울걸이 아래에 의자손이라는 글씨가 있고, 7마리의 동물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다하여

    의자손수대경이라 하며 테두리에 동물상의 문양대가 있는 수문연수대경에 포함됩니다.

     

     

    [등잔]

     

     

     

    무령왕릉 출토 수저 가운데 숟가락은 몸체가 은행알 모양이고 손잡이가 끝으로 가면서 넓어져서 기다란 삼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젓가락의 경우는 지름면이 각(角)져 있습니다.

    무령왕릉의 숟가락은 여러 줄의 돋을선과 가는선을 새겨서 화려하게 장식하여 그 품격을 더해주고 있으며 젓가락 가운데에는 손잡이 부분에 둥근 고리를 만들어 고려시대의 젓가락처럼 끈으로

    묶는 고리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무령왕릉의 숟가락과 꼭같은 숟가락이 이와 비슷한 시기의 일본의 무덤에서 출토된 바 있어 백제와 일본과의 문물교류의 한 양상을 살펴볼 수 있게 합니다.

     

     

     

     

    청동다리미

    몸체가 긴 손잡이를 따로 만들어 붙인 형식으로 고대의 다리미는 왕이나 귀족들이 묻힌 무덤에서만 나오고 있는데, 이것을 통하여 백제왕실의 의생활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은잔]

     

     

     

     

    제1전시실 무령왕릉 유물들을 둘러보며 느낀 점은 이 당시의 장식문화가 매우 발달되어 있음이 엿보입니다.  또한 세밀하며 섬세한 금장식품들을 보면 현대에도 만들기가 쉽지않은 각품들이

    어럿 보이기도 합니다.  단순치 않은 문양과 모양들 백제인들의 수준높은 공예술들은 감탄을 절로 자아내게 합니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