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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여행] 기림사에 매월당영당이 세워진 이유..
    나의 여행이야기/경상도 2012. 3. 30. 07:00

     

     

     

     

     

    서기 1455년 단종이 수양대군에 의해 폐위되자 이때 삼각산 중흥사에서 공부하던 김시습은 서책을 모두 불태우고 설잠(雪岑)이라는 이름으로 중이 되어

    방랑의 길을 떠났습니다. 이로부터 약 10년간 관서·관동·호남 등에 노니다가 세조 10년(1465) 경주에 도착, 금오산 용장사터에 산실(산실)을 짓고 이곳에서

    일생을 마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독서를 다시 시작하고 글을 짓고 시를 읊으며 안온한 생활에 들어갑니다.

     

    '금오신화'도 이때 지은 것이며 매월당(梅月堂)이란 당호 또한 이 산실 앞에 매화(梅花)가 있었으므로 이를 따서 지은 이름이라 합니다.

     이때 세조가 매월당의 거처를 알고는 데리고 오도록 하였으나 거기에 응하지 않으려고 일단 몸을 숨겼으니, 용장사 건너편 골짜기였다고 합니다.

    그런 연유로 이 골짜기를 은적골(隱迹谷)이라고 합니다.

     

    '김시습의 금오신화는 설화를 소설형식으로 이끌어 올린 것인데, 여기에 실린 다섯 편의 소설은 평양·개성·경주 등 옛 도읍지를 배경으로 우리 나라의

    고유한 신앙과 연결된 생활감정과 역사의식을 묘사하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 금오신화(金鰲神話)를 쓴 곳이 바로 경주의 금오산(金鰲山) 용장사(茸長谷입니)다.  금오산에 은거하면서 지은 소설 '우리 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이라서

    '금오신화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런 인연이 없는 이곳 기림사에 어찌하여 그의 영당이 세워졌을까요..?

    김시습이 기거하다 떠난 이후 언젠가 절집은 없어졌고, 그후 현종 11년(1670)에 경주부윤 민주면(閔周冕)이 이곳에 당(堂)을 지어, 매월당이 손수 그린

    자화상을 봉안하고 승려들을 모아 수호하게 하였습니다.

     

    영조 44년(1768)에 부윤 홍술해(洪述海)가 당을 개축하여 위판(位版)을 봉안하려 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후에 금령에 의하여 훼철되니, 고종 15년(1878)에

    이를 애석하게 여긴 경주유림(慶州儒林)이 기림사(祺林寺) 주지에게 부탁하여, 기림사로 옮겨 세워 초상(肖像)을 봉안(奉安)하고 여기에 딸린 논밭을 함께

    넘겨주었답니다. 그렇게 하여 매월당영당이 이곳 기림사에 자리를 하게 되었던 것 입니다.

     

     

     

     

    김시습의 자는 열경(悅卿)이요 본관은 강릉이니 세종 17년(1435)에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호를 매월당(梅月堂)·청한자(淸寒子)·동봉(東峰)·찬세옹(贊世翁)·벽산(碧山)·청은(淸隱)이라고도 하며 승명(僧名)을 설잠(雪岑)이라 하였습니다.

    어려서부터 총명이 특출하여 사서삼경·제자백가 등을 두루 배워 통하지 아니 하는 데가 없었다고 합니다.

     

    경주에서 떠난 후 서울 성동에 폭천정사(瀑泉精舍)를 짓고 저술을 하여 절개를 지키다가 성종 12년(1481) 47세 때 환속하여 안씨와 결혼하고 지내다가,

    다시 서울을 떠나 각지로 방황하던 중 성종 24년(1493) 충남 홍산(鴻山)에 있는 무량사(無量寺)에서 일생을 마치니 향년 59세였답니다.

    조선 정조 6년(1782) 이조판서에 추증하고 2년 후 청간(청간)이라 시호를 내리었습니다. 영월 창절사(彰節寺)의 숙모전(潚慕殿)에도 여러 단종 충신들과

    함께 배향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이곳이 아닌 이보다도 20여m높은 산비탈길에 영당을 모시었는데 다시 절 담 안쪽 입구에 영당을 새로 지었다고 합니다.

    원래 있던 건물은 헐어버려 그 흔적이 없고 지금은 이곳에서 그 영정을 모시고 있다고 합니다.

    영당안에는 단촐하게 영정을 모시는 제단하나와 영정밖에는 없습니다.

     

     

     

     

     

    기림사에 들려 뜻밖의 매월당영정을 보고 아이러니 했지만 이러한 사정을 알게되고 또한 경주유림들의 지극한 매월당 사랑이 돋보이기도 하였습니다.

    생후 8개월에 글뜻을 알았고 3세에 능히 글을 지을 정도로 천재적인 재질을 타고 났었던 그는 5세에는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후일 중용하리란 약속과 함께 비단을 하사받기도 하였답니다.

    하지만 과거준비로 삼각산 중흥사에서 수학하던중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대권을 잡았다는 소식을 듣자 미련없이 삭발하고 중이되어 방랑을 하였을 정도로 대쪽같은 그에게

    사람들은 생육신 중 한분으로 추대하고 칭송하였던 것입니다.

     

    태어난 곳은 한성이요, 생을 마감한 곳은 충청도 홍산이지만 경주 유림이 그를 이곳 기림사로 영정을 모시고 참배하는 이유는 아곳에서 그가 성리학과 불교를 연구하며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이곳 경주 금오산에서 지었기 때문이 아닌 가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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