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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여행] 신문왕이 만파식적과 옥대를 받았던 곳이라고 전해지는 이견대
    나의 여행이야기/경상도 2012. 4. 2. 07:00

     

     

     

     

     

     

    '내가 죽은 뒤에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의 평화를 지킬터이니 나의 유해를 동해에 장사지내라'  아버지대의 백제 정벌(660년)에 이어

    고구려 정벌(668년)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이후신라에 대한 당의 야심을 알아채고 그 세력을 몰아내는 전쟁까지 치러냈습니다.

    삼국을 하나로 통일하는 대업을 마무리하여 명실공히 통일신라의 찬란한 문화시대를 연 문무왕은 평소 이렇게 유언하였답니다.

     

    봉길리 해안 서면 바다쪽에 문무왕의 수중릉인 대왕암이 홀로 바다를 지키고 있었고 681년에 즉위한 신문왕은 아버지 문무대왕을 위하여 동해변에

    감은사를 세우고 금당 계단 아래를 파해쳐 동쪽에 구멍을 내어 용이 들어와 서리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후 용이 나타난 것을 본 곳을 이견대라고 합니다.

     

    이견대에서 신문왕이 용으로부터 세상을 구하고 평화롭게 할 수 있는 옥대와 만파식적이라는 피리를 하나 받았다고도 합니다

    이견대라는 이름은 신문왕이 바다에 나타난 용을 보고 나라에 크게 이익이 있었다는 뜻을 포함한 말인데,

    주역의 ‘비룡재천 이견대인(飛龍在天 利見大人)’이란 문구에서 따온 것이라 합니다.

     

     

     

     

    이견대에서는 대왕암의 모습을 걸리는 것 없이 편하게 볼 수가 있습니다.

    또한 그곳에서 바라보는 봉길해안의 풍경은 아름답기만 합니다.

     

     

     

     

     

    고려사(高麗史)  악지(樂誌)에 의하면, 어느 왕 시기인지는 알 수 없으나, 대 위에 건물을 지었다고 전합니다.

    이견대지(利見臺址)에 관하여는 현재 누정건물이 있는 장소라는 설이 오랫동안 전해 내려 왔답니다. 1968년 그 곳을 시굴한 바 몇 기의 초석자리 비슷한

    적심부가 나타났으나, 신라시대를 증명할 수 있는 자료가 발견되지 않아 이견대지로 확정짓지 못하였답니다.

    그러나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등 조선시대문헌에는 이견대지가 이견원(利見院) 옆에 있다는 기사가 있으므로 현 누정이 있는 자리는

    조선시대의 이견원지로 추정하는 견해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또 한편으로 현재 누정이 있는 위치의 뒤 언덕 위에서 신라시대 와편이 출토되는 것을 근거로

    이곳이 원래의 이견대지라는 견해도 있다고 합니다.

     

     

     

    신문왕이 세웠던 이견대는 없어졌지만 1970년 발굴로 건물지를 확인하였으며, 1979년 신라의 건축양식을 추정하여 이견정(利見亭)을 새로 지었답니다.

    하지만 지금의 위치보다 산중턱으로 더 올라간 대본초등학교 뒷산일 가능성이 더 높고 실제 산중턱을 답사한 결과 문헌에 나오는 축성의 흔적과

    신라시대 와편을 발견한 것은 물론 이견대라는 글자가 보이는 조선시대 석비도 발견되어 그 신빙성이 더욱 확고해 지고 있다고 합니다.

     

     

     

     

     

    신라의 전설이 묻혀있는 이곳..이견대의 길목에 서서히 봄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노오란 유채꽃이 심하게 부는 바람에도 아랑곳없이 바람에 흔들리며

    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그리워 이견대에 서서 저 멀리 동해를 지키고 있는 문무왕을 바라보았을 신문왕이 서 있었을 그 시절 이시기에도

    이렇게 꽃은 피고 봄이 찾아왔겠지요.

     

     

     

     

    이견대에서 내려와 봉길해안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동해구라는 표지석이 보입니다.

    동해구란, 삼국통일의 영주(英主)인 문무왕(文武王)의 해중릉(海中陵), 즉 대왕암(大王巖)이 자리잡고 있는 곳을 말합니다.

    문무왕은 욕진왜병(欲鎭倭兵)하고자 동해의 호국대룡(護國大龍)이 되어 이승에서까지 국가수호의 집념을 잃지 않겠다는 군왕이었습니다.

     

    이 같은 호국사상은 동해구의 유적인 해중릉을 비롯하여 감은사(感恩寺)나 이견대(利見臺), 그리고 석굴암과 동해구와의 관계 등에서

    같은 맥락으로 파악될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석굴암의 창건주인 경덕왕의 선왕(先王), 즉 효성왕(孝成王) 역시 화장 후 산골(散骨)된 곳이 이 동해구여서,

    석굴암 대불의 시각(視角)이 동남동 방향으로 동해구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과 연관성이 있습니다.

     

     

     

     

    그 어느 하나 개별적이지 않고 서로 연관되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이곳 경주의 유적들은 하나하나 알아 가는 맛 때문에 이곳을 찾게 됩니다.

    이견대를 찾아오면서 알게되는 대왕암와 동해구 감은사지 그리고 석굴암마저 서로 깊게 연관되어 있어 마치 묶인 실타레를 푸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오늘도 이곳 이견대에서 몰랐던 사실들을 배우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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