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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진골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오른 태종 무열왕릉을 가다.나의 여행이야기/경상도 2012. 3. 28. 07:00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유승호가 맡은 김춘추가 바로 태종무열왕입니다. 성인이 된 유승호의 연기가 많은 여심을 흔들기도 하였던 드라마이기도 합니다. 천명공주의 아들로 아들이 없어 후계가 없던 진덕여왕이 승하하자 상대등 알천의 추대와 김유신의 적극적인 지지로 왕이 된 김춘추는 외교에 능한 사람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김유신이 풍월주로 있을 때에 이미 부제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보종과 염장이 있어 양보하며 기다리다가, 24세에 비로소 제18세 풍월주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원래 보종의 딸인 보라와 결혼하여, 고타소를 낳았는데, 부인을 무척 사랑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김유신의 동생인 문희와 관계를 가지게 되었는데, 보량이 아이를 낳다가 죽은 후에 문희가 정비가 되었답니다.
642년에 신라의 서쪽 거점인 대야성(大耶城 :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이 백제에게 함락되고, 사위인 품석과 딸 고타소가 죽게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해서 김춘추는 당과의 외교관계의 전면에 나서게 됩니다. 같은 해에 청병을 위해 우선 고구려 보장왕에게 사신으로 갔으나, 보장왕이 죽령 이북의 땅을 요구하여 무산되면서 고구려에 억류당하였습니다. 이에 김유신이 1만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고구려 남쪽 경계에 들어가니 비로소 풀려났다고 합니다. 대야성에서의 패배와 고구려에 대한 외교의 실패 등은 김춘추와 김유신의 정치적 결합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결과를 가져왔는데, 이것이 추후 통일신라를 여는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고 합니다.
신라 최초의 진골 출신 왕이 되었던 그는 즉위 후 이방부령(理方府令) 양수(良首) 등에게 명해 율령을 상정(詳定)하게 하여 이방부격(理方府格) 60여 조를 제정했으며, 직계친족과 측근세력에 의한 지배체제를 구축하여 구귀족세력을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하였습니다. 한편 당나라와 계속 친교하여 깊은 신뢰를 얻고 개부의동삼사 신라왕(開府儀同三司新羅王)에 책봉되었습니다.
이러한 국내외적 안정을 바탕으로 고구려·백제에 대한 전쟁에 나섰고, 659년 백제가 자주 국경을 침범하자 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당나라에 원병을 청하여, 660년 3월 당 고종이 소정방(蘇定方)이 이끄는 13만 명의 군사를 파견하자 그해 5월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하였습니다.
남천정(南川停:지금의 이천)에 이르러 태자 법민(法敏:뒤의 문무왕)을 소정방이 머물고 있는 덕물도(德物島:지금의 덕적도)로 보내 작전계획을 짜게 한 후, 스스로 금돌성(今突城:지금의 상주 백화산)까지 나가 진두지휘하며 김유신·품일(品日)·흠춘(欽春) 등으로 하여금 정병(精兵) 5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당군과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하도록 하였고, 7월에 김유신은 백제의 계백(階伯)이 이끄는 5,000명의 결사대를 황산(黃山)에서 물리치고 당군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습니다. 이로써 태종무열왕은 숙원이던 백제합병을 실현했으며 문무왕대에 이룩된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이후 각지에서 백제부흥군이 봉기했으나 661년 백제부흥군을 격파하고, 백제의 관민 일부에게 관직을 주어 이들을 회유하였고, 고구려가 말갈과 연합하여 북한산성을 공격하자 고구려 정벌의 군사를 일으켰으며, 백제의 유민(遺民)을 위무하던 중 59세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지냈으며, 시호는 무열(武烈)이며, 묘호는 태종(太宗)입니다.
경주에는 많은 고분들이 있지만, 주인이 밝혀진 것은 드물다고 합니다. 무열왕릉의 경우에는 왕릉 앞쪽에 무덤의 주인을 밝히는 비가 세워져 있고, 머릿돌에 ‘태종무열대왕지비’라는 글자가 또렷이 새겨져 있어 무덤의 주인이 확실히 밝혀진 능으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비의 몸체는 사라지고 비석 받침돌(귀부)과 머리 장식돌(이수)만 남아 있는데, 이 머리 장식돌 중앙 부분에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당대의 명필이자 아들인 김인문이 썼다고 전하는 전서체 글씨입니다.
비석 받침돌의 거북이는 살아움직이는 듯 힘차고 사실적인 조각 수법만으로도 주목을 끌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태종무열왕릉비는 비석 조각으로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양권 최대의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국보 25호 신라태종무열왕릉비]
태종 무열왕의 능은 별다른 장식이 없이 규모가 큰 삼국시대 초기의 능으로는 마지막에 속하며 이후로는 호석을 세우는 등 화려하고 장엄한 멋을 살린통일신라 시대의 능이 시작된다고 합니다. 사적 제20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능 주변에는 우람한 소나무가 든든히 능을 지키고 있고 능을 향해 참배하듯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또한 이곳에는 무열왕릉 이외에도 몇기의 고부군이 더 있는데 누구의 무덤인지는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무열왕릉 뒤편에 있는 것으로 보아 무열왕과 가까운 왕이나 왕족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서악리 고분군이라 칭하며 사적 제14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642년 대야성이 백제에게 함락당하면서 사랑하던 딸 고타소를 잃은 슬픔을 660 백제를 멸망시키으로써 그원한을 갚은 태종무열왕은 그 이듬해 재위한 지 8년만에 그 운명을 달리하니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자인 법민이 그 뒤를 이어 문무왕이 되었습니다.
각종 이야기거리들은 많이 남긴 무열왕은 자신의 딸인 요석공주와 원효와의 인연을 맺은 이야기하며 김유신 누이인 문희와의 결혼이야기, 그리고 그 언니인 보희마저 부인으로 맞은 이야기들, 또한 보희와 문희의 꿈에 관한 이야기 '매몽설화'등 많은 이야기거리를 배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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