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천여행] 무소유 법정스님의 흔적이 남아있는 승보사찰 송광사한국의 사찰/전라 2012. 2. 11. 02:19
겨울에 찾은 송광사 마침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삼보사찰중의 하나인 송광사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에 있는 사찰로 조계종의 발상지이기도 합니다.
불보(佛寶)사찰인 통도사, 법보(法寶)사찰인 해인사, 그리고 승보(僧寶)사찰인 송광사.
신라말엽 체징(體澄)이 작은 암자를 짓고 길상사라고 부르던 것을 보조국사 지눌이 정혜사를 이곳으로 옮겨와 수도, 참선의 도량으로
삼은 뒤부터 승보사찰이 되었답니다. 지눌, 진각을 비롯한 16국사를 배출한 사찰이기도 합니다.
한국 선종의 대수도도량으로 고려 희종때 수선사로 개명하였고 송광사로 개명된 연대자료는 아직 밝혀지지않아 알 수가 없답니다.
입춘은 지났으나 아직 겨울임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하얀눈이 송광사를 향하는 길목에서 부터 내리고 있습니다.
주차장에서 부터 눈을 맞으며 송광사로 향합니다.
매표소를 지나니 두 갈래길이 나옵니다..
한쪽은 보행길 또 한쪽은 차도로 어느쪽으로 가든 송광사로 향하게 됩니다.
전 청경루가 있는 극락교를 지나 차도로 향합니다..
그곳의 풍경이 편안하면서 더욱 좋았기 때문입니다.
눈이 내려 하얀길을 만들어 놓은 저 길을 따라 천천히 사잭하듯 길을 나아 갑니다.
그 위를 지나가는 사람들과 차들의 흔적들이 눈이 만들어 놓은 길 위로 하나 둘 남겨지고 있습니다.
이제 저 눈들이 녹으면 다시 그 흔적들은 없어지겠지요.
청량각을 지나 울창한 숲 사이로 난 평탄한 흙길을 오르면, 절의 입구인 일주문에 닿게 됩니다. 전면 1칸의 다포계 맞배지붕으로 된 조선 후기의 건물로, ‘조계문’이라고도 합니다.
흰눈긋기한 아담한 돌담 벽체 사이에 자리하며, 여러 층의 다포가 화려하게 장엄되어 있습니다.
송광사 일주문은 편액을 가로로 달지 않고 창방과 평방의 중앙에 종서로 쓴 점이 다소 특이합니다.정면 중앙에 대승선종(大乘禪宗), 우측에 조계산(曹溪山), 좌측에 송광사(松廣寺)라고 나란히 3열로 썼으며, 뒷면에는 승보종찰조계총림(僧寶宗刹曹溪叢林)이라 적었습니다.
초입에서부터 선종사찰로서 송광사의 종풍과, 삼보사찰 중 승보종찰(僧寶宗刹)로서의 격을 살필 수 있습니다.
경내와 많이 떨어져 있어 전란과 화재를 피해간 듯 조선 후기의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그 옆에는 송광사 중창의 공덕주과 신도비가 봉안된 비림(碑林)이 있습니다.조계문을 지나 경내로 진입하는 홍교(虹橋) 위에 세워진 문루(門樓) 형식의 우화각은 계곡을 흐르는 맑은 물과 조화를 이루는 18세기 초의 건물입니다.
전라남도 지방유형문화재 제59호로, 능허교(凌虛橋)라 불리는 홍교와 함께 속세와 인연을 끊고 불국(佛國)으로 향하는 선승의 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답니다.
누각명칭인 우화(羽化)는 몸과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져 신선이 된다는 뜻으로, 소동파(蘇東坡)의 '적벽가(赤壁歌)'에 나오는‘우화이등선(羽化而登仙)’에서 딴 것입니다. 따라서 몸을 가볍게 하고 마음을 비워 부처님의 세계로 이끌기 위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곳은 예로부터 물소리ㆍ바람소리가 끊이지 않고 맑은 계곡에 비친 누각과 고목의 풍광이 빼어나, ‘우화청풍(羽化淸風)’이라 하여
송광사의 팔경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고 또한 송광사를 거쳐 간 시인ㆍ묵객들의 한시가 걸려 있어 아름다운 경관을 더욱 운치있게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내부 창방 위에는 송광사의 아름다움을 찬미한 '송광사외팔경시(松廣寺外八景詩)'ㆍ'송광사내팔경시(松廣寺內八景詩)' 등 12개의 시액(詩額)이 걸려 있습니다.
사중(寺中) 기록에 의하면 1707년에서 1711년에 걸쳐 건립한 후 1774년에 중수한 것으로, 18세기의 누교(樓橋) 건축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답니다.우화각의 정경은 송광사를 소개하는 상징적 이미지로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송광사는 한국 선종을 이끄는 중심사찰의 역활을 하고 있는 사찰입니다.
6.25전쟁 전의 가람배치는 의상의 법계도(法界圖)와 같았다고 하며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국사전(國師殿 국보 제56호), 하사당(下舍堂 보물 제263호),
약사전(藥師殿 보물 제302호), 영산전(靈山殿 보물 제303호), 청량각, 척주각, 우화각, 천왕문, 해탈문, 대장전 등 50여동이 있어
대가람의 면모를 짐작케 합니다.
송광사를 들어서자 마자 보이는 감로수..한붕화상이란 글이 적혀져 있습니다.
한붕이라는 스님이 만든 것일까요? 그에대한 내력은 알 수 없고 겨울이라 뼈속까지 시원한 감로수 한모금 마시고
마음을 정화시켜 봅니다.
이곳은 송광사의 중심이 되는 전각인 대웅보전입니다.. 특이하게도 이 전각은 아(亞)자형으로 우리나라의 유일한 전각입니다.
원래 대웅전은 신라때부터 있었으나 수차례 소실과 중건을 거친 후 8차중건시에 원형을 중전(中庭) 북쪽에 옮겨 짓고 승보전(僧寶殿)이라 하였으며,
현재의 건물은 1988년 대웅전 자리에 규모를 넓혀 신축하면서 그 명칭도 대웅보전이라 칭하게 되었습니다.
중앙에는 연등불(燃燈佛), 석가여래, 미륵불 등 삼세불을 주존으로 모셨으며 문수, 보현, 관음, 지장 등 4대보살을 협시로 봉안하였습니다.
삼세불의 뒤에는 1987년 금어 석정(石鼎) 스님이 그린 석가모니후불탱(釋迦牟尼後佛幀)ㆍ과법연등불후불탱(過法燃燈佛後佛幀)ㆍ
미래미륵존불후불탱(未來彌勒尊佛後佛幀)이 후불탱으로 봉안되어 있습니다.
이들 불상과 불화는 삼세여래 중 미륵불이 앞으로 56억7천만년 후에 승보종찰인 송광사에 출현할 때까지
사자상승(師資相承)으로 석가모니불의 법등(法燈)을 지켜 그 공백을 메워 줄 책임이 있기 때문에,
대웅보전에 과거 연등불과 현재 석가모니불, 미래 미륵불의 삼세불을 봉안하게 된 것이라 한답니다.
대웅보전 좌측에 위치하면서 승보전과 함께 좌우 법당으로 사용되는 지장전은 1988년의 8차 중창기에 중창된 건물로, 중건 이전에는 명부전(冥府殿)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내부는 고주 없이 5량의 가구로 처리하여 넓은 장방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습니다.
'ㄷ'자형 불단 위에는 목조지장보살좌상을 주존으로 하여, 그 좌우에 도명존자ㆍ무독귀왕ㆍ저승의 시왕(十王) 등 명부 권속들이 협시해 있습니다.
후불탱으로는 1987년 금어 조연우(曺延宇)가 그린 지장탱을 비롯하여 1963년 일섭(日燮) 스님이 그린 시왕탱ㆍ사장탱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상단 좌측에 영단이 설치되어 있어, 돌아가신 이의 천도를 위한 모든 재식(齋式)은 이곳에서 거행되고 있습니다.승보전은 승보사찰 송광사의 상징적 건물로, 6.25 이후 중창된 대웅전을 옮겨 지은 건물입니다.
초창 당시의 모습은 알 길이 없고, 7차 중창시인 1961년에 주지 금당화상(錦堂和尙)이 중창한 후 1988년의 8차 중창 이전까지 옛 대웅전으로 사용되었으며,
지금의 대웅보전을 지으면서 원형 그대로 현재의 위치에 옮겨 짓고 승보전이라 하였습니다.
건물 내부는 무고주 5량 가구와 정방형의 계단식 불단을 가설하여 석가모니부처님과 10대 제자, 16나한 및 1천250비구 제자상을 봉안하여
석가모니의 영산회상(靈山會上)을 재현하고 있다. 역사적 가치는 크지 않지만 이름에서도 살필 수 있듯이 승보사찰의 종지를 이은 송광사의 상징적 건물로서,
법당의 격식을 잘 갖춘 현대 목조건물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송광산는 조계총림으로 선찰(禪刹)이므로 공덕총림이라고도 합니다.
총림(叢林)의 뜻은 범어 vindhyavana의 번역으로 빈타파나(貧陀婆那)라 음역하며, 단림(檀林)이라고도 번역합니다.
승속(僧俗)이 화합하여 한 곳에 머무름이(一處住) 마치 수목이 우거진 숲과 같다고 하여 이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지도론 삼(智度論 三)에 의하면 '승가(僧伽)는 중(衆, 무리의 뜻)의 뜻이니 많은 비구가 한 곳에 화합하여 머무는 것을 승가라고 합니다.
마치 큰 나무들이 숲을 이룬 것을 林이라 함과 같으니, 승취(僧聚)가 모여 사는 곳이므로 총림이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즉 지금의 선원(禪院), 선림(禪林), 승당(僧堂), 전문도량(專門道場) 등 다수의 승려대중이 모여 수행하는 곳을 총칭하여 총림(叢林)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총림이 되기 위해서는 승려들의 참선수행 전문도량인 선원(禪院)과 경전 교육기관인 강원(講院), 계율 전문교육기관인 율원(律院) 을 모두 갖춘 사찰을
지칭하는 말로 우리나라는 "해인사, 통도사, 송광사, 수덕사" 국내에 4개 사찰이 있었는데, 1996년 3월 전남 백양사(白羊寺)가 총림으로 공식 승격하여
헌재 5개의 사찰이 총림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원효스님께서도 "돌아가는 바 그 하나인 마음(一心)이 바로 삼보인 것이다"라고 확언하고 계신다 합니다.
곧 우리들 본래의 마음이 다름아닌 부처요 진리며 승가라는 것이라 합니다.
본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참마음... 어느덧 세속에 물들면서 점차 혼탁해져 잊혀져 갔던 마음을 다시 정화시키며 그길을
함께 걸으며 서로 길동무를 해주는 곳이 승가라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 승가를 가장 귀한 보배라고 한 까닭은 무엇일가?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영원한 세계, 진리의 세계에 다다를 수 있으며 우리들 존재의 원천인 본래의 나, 참 나에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랍니다.그래서 값이 없는 보배요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이다. 불교의 신앙은 바로 그 보배를 향해 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대웅전 뒤편 석축 위에 자리한 건물은 대개 선(禪)을 행하는 수선도량(修禪道場)으로, 설법전은 수선사(修禪社)와 함께 이러한 목적에 의해 조성된 송광사의 대표적 건물입니다.
보조국사 당시에는 선법당(善法堂)이라 칭했다 하며, 조선 후기에는 무설당(無說堂)이라고도 하였답니다.'팔만장경각단확기(八萬藏經閣丹雘記)'에 따르면 이곳에 보조국사의 설법상(說法床)이 있었다고 하므로, 전각의 이름처럼 고승들이 설법을 해온 장소로 여겨집니다.
조선 말기에는 팔만대장경을 봉안하던 장소로서, 전각명을 팔만장경각(八萬藏經閣)이라 부르기도 하였습니다.즉, 1899년 나라에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4부 인출하여 1부는 전국의 명찰에 분산 봉안하고, 나머지 3부는 삼보사찰에 각각 봉안하도록 하였습니다.
따라서 불보사찰인 통도사와 법보사찰인 해인사에는 지금도 봉안되어 있으나, 송광사의 대장경은 1951년 화재 때 설법전ㆍ수선사가 불타면서 함께 소진되고 말았습니다.
현재의 건물은 1968년 중건한 것으로, 법회나 모임 등의 대강당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건물로 건물 외부에는 경봉(鏡峰) 스님이 쓴 설법전(說法殿)과 구산(九山) 스님이 쓴 금강계단(金剛戒壇)등
2기의 편액과 주련이 걸려 있습니다. 국사전ㆍ수선사를 비롯한 이곳 선원구역은 외인의 출입을 일체 금하고 있습니다.
이 탑은 송광사 관음전 뒤뜰 언덕에 있는 탑으로 보조국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탑입니다.
보조국사는 송광사 16국사 중 제1세이자 고려불교를 바로잡기 위해 정혜결사를 일으킨 주인공으로, 1210년(희종 6) 세수 53세로 열반하였습니다.
그 해 희종이 불일 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라는 시호와 감로탑(甘露塔)이라는 탑호를 내렸으나, 바로 탑비와 탑이 세워지지 않고
3년 뒤인 1213년(강종 2) 세워지게 된 것이랍니다. 그동안 경내에서 몇 차례 자리가 옮겨지다가 현재의 위치로 자리잡게 되었답니다.
감로탑의 외형을 보면 통일신라시대의 정형화된 팔각원당(八角圓堂)의 변형임을 알 수 있답니다.
기단부는 맨 하단에 2단의 정사각형 대좌를 안치하고 그 위로 네 귀퉁이에 각을 이룬 호형(弧形)의 대좌를 삽입하였는데, 이 같은 형식은 매우 특이한 것으로
맨 밑의 2단 정사각형의 대좌는 상단으로 연결된 석질(石質)과 다른 점으로 보아 1926년 이 탑을 해체복원하면서 새로 끼워 넣은 것으로 보인답니다.
그 위로 다시 정사각형의 하대석이 연결되는데, 한 돌로 이어진 윗면에는 희미하게 장식된 2단의 복련석(覆蓮石)이 탑신을 받고 있습니다.
탑신은 8각의 옥개석이 이어지고 그 위로는 상륜부가 솟아 있습니다.
감로탑은 덧붙여진 기단부 하단의 일부 지대석을 제외하면 모두 원형을 고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옥개석의 급격한 전각과 처마의 귀솟음, 원구형을 이루고 있는 탑신의 양식 등이독특하며, 고려 말의 양식적 특징을 보이고 있습니다. 현재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256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대웅전 우측 상단에 자리한 관음전은 1903년에 성수전(聖壽殿)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졌으며, 1955년에 관음전으로 바뀌었습니다.
설립 당시는 1902년 고종황제의 성수망육(51세)을 맞아 사액(賜額)된 황실 기도처의 역할을 하였답니다.
건물 내부에는 중앙 감실형 불단 위에 조선시대의 목조 관음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관음보살의 좌우에 단청된 태양과 달은 각각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화려한 연화문의 소란반자와 화조도ㆍ산수화 등이 내부를 장엄하고 있으며, 특히 좌우 측벽에 그려진 조선후기 품계도(品階圖)는 일반사찰의 벽화와는
다른 송광사 관음전의 독특한 특성을 잘 드러내주고 있답니다.
* 관음전의 특징 : 관음전은 그 자체가 하나의 용궁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모든 내부의 장식은 물속에 있는 물고기와 산호등으로 단청이 되어 있으며, 용들의 머리와 꼬리와 뒤엉켜 있는 형상입니다.
또한 송광사의 불의 기운을 막기위해 관음전 처마밑에 빙 둘러서 海(해) 水(수) 라는 글자가 쓰여져 있답니다.또한 내부의 벽화는 왕을 호위하듯이 정일품에서 부터 관직에 있는 사신들이 허리를 숙이며 절을 하고 있습니다.
불이문(不二門)...중심법당에 가장 가까이 있습니다.
일상의 공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부처님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문입니다.
[不二] 는 '둘이 아니다' 라는 뜻으로 이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불법의 진리속으로 들어가 부처님과 하나가 된다는 뜻 입니다.
규모가 큰 사찰에서 일주문과 중심 불전을 잇는 축선 상에 몇개의 문이 연이어 서 있는데
이들 문은 사찰 초입의 일주문과는 달리 이미 신성한 종교적 공간 속에 자리잡고 있는 문입니다.
배치 순서는 보통 금강문-천왕문-불이문의 순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 송광사는 불이문이 하사당 들어가는 입구에 서 있는게 특이합니다.
하사당은 스님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불이문이 대문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천왕문을 들어서는 한 쪽에 놓인 ‘비사리구시’는 쌀 일곱 가마에 해당하는 약 4천명분의 밥을 담아 저장할 수 있는 목조용기(木造容器)입니다.
그 크기에서 보는 이들을 압도하고 있는데, 1724년 전라북도 남원시 송동면 세전골에 있던 싸리나무가 태풍으로 쓰러지자 이를 가져와 만든 것이랍니다.조선 영조 이후 절에서 국재(國齋)를 모실 때 사찰로 모여든 대중들을 위해 밥을 저장했던 일종의 밥통입니다.
보조국사와 당나라의 담당국사가 나란히 꽂은 지팡이가 살아서 자란 것이라는 전설을 간직한‘쌍향수(雙香樹),어느 순서로 포개어도 크기가 오묘하게 딱 들어맞는다는 바루 세트인 ‘능견난사(能見難思)’와 함께 송광사의 이른바‘3대 명물’중 하나로 칭해지고 있습니다.
볼 곳도 알 것도 많은 송광사 하루를 꼬박 있어도 모자른 이곳을 단시 몇시간안에 돌아본다는 것은 무리인듯 합니다.
봄이 오면 다시 이곳을 찾아 와 암자까지 두루 살펴봄이 좋을 듯 합니다.
스님들이 수행하는 곳이라 제약이 많았던 송광사 아쉬움을 가득 잡고 돌아섭니다.
하지만 호기심으로 그분들의 수행을 방해할 수는 없겠지요..
돌아가는 길목에 서니 한동안 내리던 눈이 점차 잦아듭니다..
조만간 그만 내릴 듯 싶습니다. 하늘도 아쉬운 제 맘을 아는 듯 돌아가는 발길 조심하라고 하는 듯 합니다.
조용한 경내에 흐르는 물소리 조차 크게 들리고
목탁과 독경소리에도 불구하고 자기만의 소리를 고집합니다. 나름대로의 법칙이겠지요.
우리나라는 삼보사찰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통도사는 불보사찰(佛寶寺刹), 부처님의 가르침인 팔만대장경의 경판이 모셔져 있는 해인사를 법보사찰(法寶寺刹),
한국불교의 승맥(僧脈)을 잇고 있기 때문에 승보사찰(僧寶寺刹)이라 합니다.
송광사가 한국불교의 승맥을 이었다는 것은 두가지 사실에 연유한다고 합니다.
첫째는, 지금으로부터 800년전 고려 때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스님께서 정혜결사를 통해 당시 타락한 고려 불교를 바로잡아
한국불교의 전통을 확립하였는데 그 근본도량(根本道場)이 바로 송광사였다 하고
다른 하나는 지눌 스님의 뒤를 이어 송광사에서 15명의 국사들이 출현하여 지눌과 함께 총 16명의 국사가 나와
한국불교의 전통을 면면히 계승하여 왔다는 것에 있습니다.
☆
☆
☆
송광사에는 제게 또하나의 기억을 남겨주고 있습니다.
우연히 여수를 여행 중 밤에 숙소에서 쉬던 중 다음날 이곳 송광사에서 무소유의 법정스님이 다비식을 거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아침에 달려왔으나 이미 수많은 인파와 차량에 가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른 기억이 납니다.
그 이후 이곳을 다시 찾았고 서울에 그 분 흔적이 남아있는 이곳 송광사의 초기 명칭이었던
길상사를 찾았던 기억이 납니다. 오늘도 이곳을 들리며 법정스님의 흔적을 찾아봅니다.
법정스님의 길상사를 연결합니다 .http://blog.daum.net/woogilane/7045371
'한국의 사찰 > 전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도여행] 천년상록수림이 있는 곳으로 유명한 첨찰산 쌍계사 (0) 2012.03.14 [변산여행] 관음조가 단청을 하고 대호선사(大虎禪師)대웅보전을 지었다는 내소사 (0) 2012.02.15 [구례여행] 가을색이 완연한 부도가 아름다운 절집 연곡사 (0) 2011.11.22 [구례여행] 지리산의 맑은 물과 정기 남방제일선찰인 천은사를 찾다. (0) 2011.08.20 [완주여행] 나라의 아픔을 함께 슬퍼한 호국고찰 - 완주 송광사 - (0) 2011.0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