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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원도심] 옛제주의 중심 제주원도심 성굽길답사
    설렘 그리고 감성 in Jeju/제주이야기 2016. 3. 2. 07:00




    "옛 것을 살려 미래를 일구다"  원도심 도심재생을 위한 제주시 원도심 성굽길답사





    옛 탐라시대에서 부터 이어져 내려온 제주성은 고려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제주의 경제,사회,정치,문화의 중심지로 지금의 "제주시"의 발원지입니다. 제주성이 축조된 시기는 아직까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조선 태종실록과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토대로 탐라국시대부터 이미 축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제주성을 중심으로 한 제주 원도심은 제주성과 함께 그 역사를 같이하고 있어 성곽도시로서의 역사성을 지니고 있는 제주의 중심지이기도 합니다.


    제주성 안을 중심으로 한 제주 원도심은 행정구역상 일도1동, 건입동, 삼도2동, 이도1동 등 4개의 동이 이에 포함되며 과거 제주도청과 교육청, 경찰국 등 각급 기관을 비롯해 대학과 고등학교, 상업 및 금융관련시설 등이 모두 원도심과 주변지역에 집중돼 있었고 패션·쇼핑의 일번지로서 '제주의 명동'이라 불릴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원도심 외곽지역으로 도시개발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상황이 바뀌었고 1980년대 들어 주요 행정기관과 교육기관이 이전하면서 제주시가 원도심과 신도심으로 이원화되기 시작,1990년대 제주시는 구제주(원도심)와 신제주(신도심)라는 2개의 도심부로 고착화 되었고 신제주로 옮겨간 행정기관이 완전히 자리 잡으면서 그 주변을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제주의 가장 큰 문화소비층인 10대와 20대 젊은 세대들은 제주대학교가 한라산 중턱 아라동으로 옮겨진 탓에 학교 주변 대신 대중교통의 교차점인 제주시청권에 머물면서 자연스럽게 대학로 상권을 만들어지면서 원도심 일대는 상권 침체기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또한 연동과 노형등 신시가지가 들어서면서 그곳에도 다양한 상권들이 형성되면서 더욱 원도심은 쇠퇴화가 가속되었고 건물의 신축은 물론 증·개축마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원도심은 그야말로 퇴락한 도시풍경을 연출하게 되었습니다.



    옛 것을 살려 미래를 일구다


    제주도정은 옛 문화의 중심지이자 제주시의 발원지이기도 한 제주 원도심을 재생하고자 지난 해 4월 '제주시 원도심 도시재생사업'으로 국토교통부 도시재생사업 공모에 신청하였고 올해 그 안이 선정되면서 2020년 완성을 목표로 원도심 재생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합니다.



    원도심 도시재생 활성화 방안마련을 위한 성굽길답사


    지역주민과 전문가 그리고 도지사와 도의원들과 함께 제주시 SNS서포터즈는 원도심 성굽길을 둘러보며 원도심 곳곳의 역사·문화적 자원을 둘러보며 주거지역과 연계하여 문화자원 간 연속성을 확보하고 제주성과 성내 주요 전통경관지를 복원하는 방안에 대해 그 실태를 확인하며 몰랐던 제주 원도심의 역사를 전문가를 통해  알아가는 시간을 갖게되었고 이는 본격적인 제주 원도심 도시재생사업의 시작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꽃샘추위가 잠시 주춤하여 포근한 봄날과도 같았던 이 날, 옛 제주의 중심이었던 목관아에서 모여 성굽길 답사를 시작하였고 마침 봄마중을 하러 수줍게 핀 매화가 겨우내 움추렸던 마음을 활짝피게 만듭니다. 


    이 날의 답사일정은 목관아를 출발하여 서문로타리 - 구)제주병원 - 남문로타리 - 시민회관 - 오현단 - 남수각 - 기상대(공신정터) - 고씨주택 - 탑동으로 이어지는 수순이며 약 2시간 여정의 일정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탐라순력도 제주조점] [제주도립박물관 제공]




    조선시대의 제주성은 제주목(濟州牧)관아와 민가를 보호하는 읍성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었고 3문(동문·서문·남문), 2수구문(남수구·북수구), 간성 2문(소민문·중인문)을 축으로 제주 중심부를 에워싸며 연결되었습니다.(참조 탐라순력도 제주조점)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25∼1928년 제주항 개발 당시 제주성을 허물어 바다를 매립하는 골재로 사용하면서 현재는 제주지방기상청 후문 계단, 오현단 등에 그 잔해의 일부(190m)만 남아 있다고 합니다.▲

















    제주시가 확장하면서 생겨난 신(新)도심과 구별 짓고자 제주성 일대에 붙여진 이름이 구도심(구제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구도심이란 말에서 낡고, 퇴락하고, 침체된 부정적 이미지를 떠올린다. 이 때문에 부정적인 느낌을 지우면서도 과거 도시 근간을 이뤘던 옛 제주성 일대의 의미를 되살린다는 뜻에서 원도심이라는 용어가 새로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구도심이란 말이 주는 이미지 그대로였습니다. 상권이 점차 쇠퇴되고 증, 개축이 이루어지지 않아 여기저기 보이는 건물들은 낡고 보수가 되지 않아 도심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황량한 분위기가 곳곳에 남아있습니다. ▲

     
















    언제부터인가 시간이 멈춰져 있는 듯한 골목길 그래도 한 때는 도심의 주택지였겠지만 세월이 흐름을 타지 못하고 어느 순간부터 이 곳은 시간이 멈추어 서 있는 듯 합니다. 옛 제주성의 서문이였던 곳으로 지금은 그 흔적조차 사라지고 서문의 기둥석만이 화분의 받침대가 되어 홀로 서 있습니다. 아무런 표시조차 없는 이 돌기둥은 무심코 지나가면 찾을 수 조차 없이 철저히 외면을 당하고 있고 해설사의 설명이 아니었으면 그냥 지나칠 수 밖에 없습니다.▲












    제주 최초의 교회인 성내교회입니다. 1908년 조선 예수교 장로회 소속 이기풍목사가 세웠고, 그 시작은 칠성로에 임시거처를 정하고 전도하다가 1910년 삼도리에 있는 출신청(出身廳)건물을 사들여 성내교회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당시에는 목조건물이었으나 지금은 현대식 건물로 재건축되었고  신도가 늘어나자 제주동부교회를 설립하고, 성내교회는 제주서부교회로 명칭을 변경하였습니다. 1994년 제주서부교회는 원래 이름인 성내교회로 다시 명칭을 환원하였고, 2004년 9월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는 성내교회를 역사유적지교회로 지정하였습니다. ▲












    성내교회를 지나 곧바로 눈에 들어오는 회색 낡은 건물이 있습니다. 낡고 오래되어 철거위기에 처한 건물인데 이 건물은 구)현대극장 건물입니다. 지금은 잡화를 취급하는 대교상사가 들어서 있는데 예전에는 조일구락부라는 곳으로 "제주도 민주주의민족전선"이 결성되었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1946년 2월 14일 이승만을 의장으로 하는 미군정 자문기관 "민주의원"결성하여 세를 모으자, 좌파진영에서도 이에 맞서는 조직으로 좌파 총연대 조직 "민주주의민족전선"을 만든 것 입니다. 하지만 결성되자마자 시련을 겪는데 3.1절 발포사건이후 3.1절 기념집회를 주도했던 간부들이 대거 검거되어 의장단도 일부 교체되었던 것입니다.


    아이러니 한것은 4.3사건이후 4.28평화협상 때 협상성사를 위해 노력했던 "민주주위민족전선"이 이 곳 조일구락부에서 결성식을 하였고 4.3사건 때 학살을 주도하였던  "서북청년회 제주도지부"의 발족식도 이 곳 조일구락부에서 거행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 증, 개축을 통해 현대극장이 들어섰고 지금은 거의 폐허가 되어 철거위기에 처한 건물이 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













    제주 돌담이 아름다운 전통 한옥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 곳은 제주도 유형문회재 제6호로 지정받은 "향사당"으로 조선시대 고을의 나이많은 어른들이 봄과 가을 두차례 모임을 갖고 활쏘기와 함께 주연을 베풀며 고을의 당면과제를 의논하거나 민심의 동향을 살피던 곳 이었고, 이후 향청(鄕廳0의 기능을 갖게 되면서 고을 주민의 여러가지 일을 자치적으로 의논하여 처리하기도 하였습니다. 향사당은 처음에는 유향소(留鄕所)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으나 1475년(성종 6년) 유향소가 다시 설립될 때 중국 주(周)나라의 제도를 따라 풍속을 교화하되, 특히 예악과 덕행을 세우는데 제일인 "향사음례(鄕射飮禮)를 행하는 유향소" 라는 뜻으로 향사당이라 개칭하였답고 합니다. 이전에는 개방하여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으나 지금은 들어갈 수가 없어 밖에서만 둘러볼 수 밖에 없네요. ▲




















    " 제주 원도심 일대에는

    공방이나 예술 등 창작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임대료를 지원하여

    이 곳에 자리를 잡은

    젊은 예술인들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








    "구 제주대학병원 앞에서

    잠시 쉬었다 갑니다.

    오늘 담사길은 방송국에서도

    관심을 갖고 나와

    동행 취재를 하고 있습니다." ▲











    "잠시 휴식을 마치고

    다시 길을 나아갑니다. 골목안에 숨어 있는

    메가박스가 눈에 들어오네요"













    길을 걷다 또다시 눈에 들어 온 제주 전통초가입니다. 

    박씨초가로 200여년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문 입구에는 말을 타고 내릴 때 디딤돌로 쓰였던 하마석(노둣돌)이 

    그 당시 그형태 그대로 모습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

















    축성년도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고려 숙종때 확장 축조하여 면모를 새롭게 하였던 제주성은 제주지역에 많이 있는 현무암으로 구성되어져 있고 둘레 2,280m에 달하는 평지에서 구릉으로 이어지는 평산성으로 동서를 장축으로 하는 부정형을 띠고 있었다고 합니다.  


    왜적의 잦은 침략과 하천의 범람 때문에 자주 증축을 하였다고 하고 동,서,남, 세곳의 성문과 남과 북으로 두개의 수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산지천과 가락천 두 강을 식수원으로 삼았고 성문의 이름은 연양문(동문), 진서루(서문), 정원루(남문)이라 하였습니다. 일제에 국권피탈 후 1914년과 1915년에 제주성의 세 문루와 간문은 헐렸고 1925년 부터 1928년까지 이루어진 제주항 개발공사 당시 바다를 매립하는 골재로 사용하기 위해 성벽을 헐어서 지금은 일부만 남아있는 모습입니다. 


    제주시는 제주성 복원사업에 시동을 걸었고 2023년까지 고증을 거쳐 옛 모습을 되찾는다 하니 제주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랜드마크가 생기지 않을까 기대가 됩니다. ▲













    제주성지 인근에 자리잡은 오현단은 조선시대때 제주에 유배되었거나 방어사로 부임하여 이 지방 발전에 공헌한 다섯사람을 배향한 제단입니다.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귤림서원이 헐린 후, 1892년(고종 29) 제주유림들의 건의에 의해 귤림서원에 배향되었던 오현을 모신 제단으로 중종 15년(1520)에 유배된 충암 김정, 중종 29년(1534)에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온 규암 송인수, 선조 34년(1601)에 안무사로 왔던 청음 김상헌, 광해군 6년(1614)에 유배된 동계 정온, 숙종 21년(1695)에 유배된 우암 송시열 등 이 다섯분들이 오현으로 모셔지고 있습니다. ▲





    [동문시장 주차장)















    마치 부산의 언덕길을 걷는 듯한 느낌으로 운주당 터를 찾아 골목길을 올라 갑니다. 운주당은 왜구의 공격에 대비해 바다가 훤히 보이는 제주읍성의 가장 높은 언덕에 지었고 그곳에서 내려다 보며 군사지휘를 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졌다고 합니다.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고 빽빽하게 들어선 건물들로 인해 바다는 보이지가 않습니다. ▲
















    제주기상청내에 청사신축부지 주변에 공신정터가 있습니다. 공신정은 제주성의 대표적인 누정으로 알려져 있고 산지천의 빼어난 경치를 한 눈에 볼 수 있었던 정자였다고 합니다. 공신정은 목사 이원진이 1652년 북수문위에 세웠던 공신루에서 연유한다고 합니다. 


    1808년 한정운 목사가 낡고 헌 것을 고쳐 지으면서 공신정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그 뒤 폭우로 허물어지자 1831년 이예연 목사가 삼천서당 북쪽으로 옮겨세웠습니다. 1897년부터 5년간 제주에 유배됐던 김윤식은 '속음청사'를 통해 공신정에서 굽어본 산지천 주변의 아름다운 정취를 읊기도 했다. 공신정터 인근에는 1736년 김정 목사가 정비했다는 시인묵객들의 휴식조망터인 달관대(達觀臺)터도 있어 이 일대가 전망대로 이름을 날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공신정이 일제에의해  헐리게 된 것은 1928년이며 제주신사를 세우면서 허물게 된 것입니다. 제주신사는 1945년 광복을 이루기까지 존재하였으나 그 해 10월 건입동 청년들에 의해 부서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은 제주 기상청이 신청사를 짓기위해 부지를 매입하였으나 제주성 정비계획과 함께 공신정 복원사업을 추신하고 있는 제주시의 계획에 의해 보류중에 있습니다. 


















    오늘의 마지막 코스는 북성홍문터입니다. 이곳은 제주성 북수구로 홍문이 있던 곳인데 처음에는 죽서루가 있다가 홍수로 유실되고 1652년(효종3) 목사 이원진이 보수하면서 공진루를 세웠다고 합니다. 하지만 홍수가 날 때마다 무너져 내려 아예 문루를 없애고 홍문만 남아있다가 그마저 1927년 홍수로 유실되고 말았습니다. 


    원도심 성굽길답사는 너무나도 많이 유실된 제주의 역사가 안타깝다는 생각과 제주성 복원을 중심으로 옛 것을 살려 미래를 일구고자 하는 제주시 원도심 도시재생활성화 사업이 쉽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앞서게 됩니다. 


    하지만 칠성로와 나문한짓골 등 문화거리의 꿈틀거림과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먹자거리(흑돼지, 회타운), 그리고 동문, 서문시장등 다양한 컨덴츠를 살릴 수 있는 기반으로 기획하고 있는 다양한 사업들이 서로 상충효과를 이뤄 하나의 큰 컨덴츠로 뭉친다면 역사와 문화, 예술 그리고 먹거리까지 경험할 수 있는 융복합적인 멋잔 작품이 탄생하지 않을까 기대도 한번 해 봅니다.





    성굽길답사(이동동선).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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