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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의 검은보물 제주흑우] 제3편 조선시대의 제주흑우설렘 그리고 감성 in Jeju/제주이야기 2015. 6. 3. 07:00
조선시대 목마장과 제주흑우에 역사적 배경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제주에서는 말과 소의 중요성이 대단하여 그에 대한 관리가 더욱 체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태조 7년(1398) 제주지역에 우마적을 조사한 결과 말은 4,414필이고, 소는 1,914두였습니다. 우마적은 모두 5통이 작성되어서 목장을 관리하는 감목관, 제주목사, 전라도관찰사, 사복시, 병조에서 각각 1통씩 관리하였고, 따라서 조정은 이 우마적만 놓고서도 각 목장의 사육두수를 훤히 알 수 있었습니다. 제주도 목마장에 대한 발전적인 시도는 고려시대에 목마장은 해안 평야지대에 설치하여 민가의 농작물 피해가 많았다고 합니다.
세종 11년(1429)에 제주 출신 고득종이 목장을 한라산 산록으로 옮기어 축장(築墻) 할 것을 임금께 건의 하자 윤허하여 20소(所) 60둔(屯) 을 설치하였고, 고득종은 한라산 기슭 4면에 목장을 축조하여 10소장으로 나누어지게 되는 시초를 열었습니다. 제주지역 인구가 점차 증가하면서 개간으로 농사짓는 지역이 확대되어 나가자, 목초지가 줄어들 수밖에 없게 되어 목장지역내 잣성을 쌓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하잣성 안에 들어있던 민가는 모두 그들의 원하는 바에 따라 땅을 내어주어 밖으로 옮기게 하였다고 합니다. 잣은 제주어로 성(城)의 뜻이며 소장경계에 돌담을 아귀 맞추어 쌓아 높이는 1.20-2m. 폭0.70-1.20m로 길게 쌓은 돌 목책(牧柵)으로 자연 그대로 선인들의 지혜로움이 돋보입니다.
그러나 중산간 일대가 모두 목장지역으로 묶여 있었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목초지 확보 차원에서 농사를 법으로 금지하여 제주에 백성들은 상대적으로 농경지의 감소를 가져왔고, 이는 도민들의 생활을 어렵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관아에서는 각 목장의 우마를 점검하기 위해 백성들을 수시로 동원하여 점검시기가 농사철이어서 동원되다 보면 1년 농사를 망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에 흉년이 겹치면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고, 이런 상황 속에서 기근에 허덕이는 도민들의 일부는 한라산으로 숨어 들어가 몰래 우마를 훔쳐, 도살하여 고기를 먹음으로써 목숨을 연명해 나갔다고 합니다. 우마도적은 각 목장이 있는 곳에서 빈번하게 발생하였고, 그들은 거골장(去骨匠), 백정(白丁), 화척(火尺)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이 외에 우마도적에게 기거할 장소 및 도살 장소를 빌려주거나 훔쳐 온 우마를 처리해 주는 등 우마도적과 결탁하여 영리를 추구하던 와주(窩主)들도 존재하였고, 더구나 우마 값이 노비 값에 비해 3배나 많을 정도로 매우 높았으므로, 소와 말을 중하게 여기고 노비를 가벼이 여길 정도로 우마의 중요성은 대단하였습니다.
일반 백성들의 경우도 관에 신고만 하면 매매가 가능하였기 때문에 우마를 훔쳐 몰래 팔아넘기는 현상도 나타나 장사꾼들이 제주를 왕래하면서 우마피(牛馬皮)를 무역하여 생활하는 자들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우마의 수가 줄어들자, 조정에서는 도살자들을 육지로 출륙시켜, 육지에서 제주에 도망간 사노비의 경우는 본래 육지주인에게 돌려보냈고, 평민과 공노비를 강제 이주시키도록 하였습니다. 우마도적 1천 여 명 중에 초범을 제외한 재범자만 650여 명을 평안도로 이주시켰다고 합니다.
1653년에 탐라지에 의하면 “ 흑우를 기르는 국둔(國屯)의 소는 순흑색이 적고 잡색이 많았고 나라에서는 제사에 검은소를 사용하였는데 원래 15마리였는데 5마리를 추가하여 모두 20마리로 하였습니다. 해마다 진상하여 합우하나 부족하여 걱정이다” 라 하였고, 영조 26년 (1750년) 흑우장을 가파도에 설치하고 50마리를 방목하여 진상에 대비하였다는 기록 (탐라기년, 김서익.1918년)에 의하면 제주흑우 사육은 체계적으로 국가 관리가 되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1702년 제작된 탐라순력도(이형상 목사에 의해 제작)에 흑우를 점검하는 장면이 나타나고 있습니다[그림3]. [그림4]는 이형상 목사의 모습입니다.
당시 제주흑우는 별방조점 247두, 정의조점 228두, 대정조점 228두, 명월조점 185두, 조천조점 87두, 애월조점 81두, 서귀조점 39두, 우도조점 23두 등 총 1,118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정조 17년경) 제주에는 국영목장으로서 말목장이 10개소가 있었고, 소 사육을 위하여, 1소장 내에 황태장(구좌읍 덕천리 및 선흘리일원), 10소장 내에 천미장(표선리일원), 대정현에 모동장(구억리일원)을 두었고, 사양방법은 청초절에 곡초를 베어 눈,비를 피해 쌓아 두었다가 겨울에 먹이고, 봄이 되어 풀이 무성하면 목장에 방목하였다고 합니다. 1789년에 제주흑우는 1소장에 553두, 모동장에 203두, 정의현에 440두, 가파도별둔장에 103두가 사육되었습니다.
1399년 발간된 수의학서인 우의방(牛醫方)에 의하면 한우는 모색이 아주 다양하였다고 합니다. 누런색의 황우, 검은색의 흑우, 얼룩색의 이우, 흰색의 백우, 검푸른색의 청우, 사슴같은 녹반우 등으로 구분되고 이러한 한우의 모색은 우의방외에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다양한 색채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우의방에 의하면 흑우는 머리가 희고 꼬리가 흰 흑우와 머리위에 흰털이 있는 흑우 등 2가지 흑우가 출현하고,1910년 주선지산우에 자료를 보면 한우의 모색은 주로 적색이지만 적갈색도 분포하고, 흑백무늬소도 다소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의 제주흑우는 나라에 제사를 지내기 위한 제향흑우로서의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어 그 가치를 메우 귀히 여겼고 그렇기에 국가가 체계적으로 사육관리를 핳게 된 것 입니다.
* 참고자료제공 : 제주농업 마이스터대학 축산학과/한우전공 주임교수 문성호교수
* 참고사진제공 : 제주국립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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