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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여행] 첨성대에서 신라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을 그려 봅니다.
    나의 여행이야기/경상도 2012. 4. 9. 07:00

     

     

     

     

     

     

     

    "내가 첨성대를 지을 때 옆에 있었어"  1박2일 100번째 여행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유흥준교수와 함께하는 경주편에서 첨성대앞에서 김종민이 첨성대를 누가 지은 지 안다며  선덕여왕이라고 하자 옆에 있던 엄태웅이 툭 던진 한마디였습니다.  드리마 선덕여왕에서 김유신역을 맡았던 엄태웅의 재치 넘치는 말이 기억이 납니다.

     

    경주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석굴암과 불국사 그리고 바로 이곳 첨성대를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첨성대는 경주를 대표하는 랜드마크중 하나임이 틀림 없습니다.

    경주를 찾는 사람뿐만 아니라 비록 이곳을 다녀가지 않았던 사람이라도 첨성대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것이라 굳이 설명을 안해도 다 알만큼 너무나도 많이 알려진 곳이지요. 일반적으로 첨성대는 우리나라 최초의 별을 관측하는 곳으로 지금의 천문대역활을 한다고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국보 제31호이며 신라시대 선덕여왕이 세웠다는 것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신라 최초의 여왕이 된 선덕여왕 632년 정월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그의 딸인 덕만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이것은 바로 그 자체가 커다란 사회적 이슈가 되는 큰 사건이 됩니다. 그녀가 왕위를 계승한 가장 큰 이유는 신라시대가 가지고 있는 골품제도의 의한 성골이라는 당시의 신분제도에 의한 것으로 남자 '성골'이 없다는 이유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선덕여왕은 지기삼사(知幾三事)의 고사가 있듯이 지혜로운 인물이기도 합니다.  간단하게 얘기 하자면 당에서 보내온 모란꽃 그림에 나비가 그려져 있지 않을 것을 보고 모란에 향기가 없음을 알아맞춘 얘기,  연못에 두꺼비가 모인곳을 보고 여근곡에 백제군이 매복하여 있음을 알고 이를 격퇴하였다는 얘기,  죽을 때 도리천에 묻어달라고 유언하면서 낭산에 능을 쓰라고 하였는데, 후일 낭산 아래 사천왕사가 창건되면서 결국 선덕여왕릉이 도리천에 위치하는 형국이 되었다는 얘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녀가 지혜로운 여인이라고 하더라도 최초로 여인이 왕이 된 사건은 그 당시에도 사회적으로 많은 이슈와 분란이 많았을 듯 합니다.

    처음에는 선택에 의해서 왕이 되었지만 왕이 된 이후에는 왕으로서의 독자적인 길을 걸어가고자 했던 선덕여왕은 여인의 한계를 넘어 자신의 권위를 상징화 하고 이미지할 능력을 보이고자불교를 적절하게 이용하였답니다.

     

    유명한 황룡사의 9층 목탑도 그녀가 세웠고 이는 서라벌 도성을 압도하는 위용으로 서 있는 9층탑에 자신의 권위를 세우고자 하였고 또한 이곳 첨성대도 '하늘의 뜻'을 전하는 천문을 관측하고자하는 상징물로 당시 어수선 했을 민심을 다독여 나갔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첨성대에 관한 최초기록인 '삼국유사'에 의하면 첨성대의 건립시점을 선덕여왕대(632~647)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첨성대의 정확한 건립시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견해가 나오고 있습니다.

     

    - 선덕여왕 2년(633)설 :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에 의거 '당태종정관7년계사 신라 선덕여왕 소축루석위지'(唐太宗貞觀七年癸巳 新羅 善德女王 所築累石爲之)라 하여 당의 연호인 정관 7년은 계사년이며 633년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의 기준에 따르면 계사년은 선덕여왕 재위 2년(633)년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의 기준으로는 선덕여왕 원년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세종실록지리지]가 건립연도를 이와같이 설정한 근거는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만약 이 기록이 맞다면 첨성대는 선덕여왕의 왕권 강화를 위한 조형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 황룡사 9층목탑(645) 동시 건립설 : 선덕여왕 14년(645)에 착공되어 이듬해인 선덕여왕 15년(646)에 완공된 것으로 보이는 황룡사9층목탑은 백제의 많은 건축기술자들이 초빙되어 지어진 것이며 같은 시기에 첨성대도 축조되었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는 황룡사 건립후 얼마 후인 675년에 백제 천문학자들의 직접 지도하에 일본의 점성대(占星臺)가 설립되었다는 사실에서 볼 때 백제에는 이미 같은 음(音)이라고 불리는 천문대가 있었다 하며 백제 천문대는 주비의 법(法)에 의하여 세워진 측경대였을 것이며, 이것이 신라에 영향을 주어 첨성대로 일본에 건너가 점성대가 되었으며 나아가 당에게 자극을 주어 주공측경대(周公測景臺)의 재건을 보게 되었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황룡사의 9층목탑이 '대외적으로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려는 노력'에 있었다면 첨성대는 '대내적으로 당시 종교적인 갈등과 혼란을 마무시키고 화합하려는 의지'와 관련되었을 것으로 보여진다고 합니다.

     

    - 선덕여왕 몰년(547)설 : 다수의 학자들이 첨성대 건립시기를 선덕여왕 몰년으로 보는데 이는 주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의 기록에 따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보다 이전 기록인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에  비담의 반란발생(647년 1월7일), 첨성대의 건립, 선덕여왕의 죽음(647년 1월 8일)이 차례로 적혀있다고 합니다.

    만일 첨성대가 선덕여왕 몰년에 축조되었다면 첨성대는 선덕여왕의 죽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보며, 만약 첨성대가 선덕여왕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면, 이는 곧 첨성대가 천문관측소 이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것을 의미 한다고 합니다.

     

    - 이외에도 선덕여왕 초년설선덕여왕 말년설등이 있으며 아직도 첨성대의 정확한 건립연대와 그 용도는 추측만 가능할 뿐 아직도 연구 진행중이라고 합니다.

                                                                                                [다음 백과사전 워키백과 참조]

     

     

     

     

     

    여인으로 태어나 최초의 여왕으로 등극을 하지만 재위기간 내내 정치적인 한계를 맛봐야 했던 선덕여왕.  당으로 부터는 여인이 왕이 되었다며 무시를 당하고 백제와 고구려의 잦은 침략으로 나라가 어수선하고 마지막으로 여왕이 다스리기 때문에 나라가 혼란스럽다 하여 상대등비담의 반란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끝내 수명을 다하는 비운의 여인이기도 했지만 또한 그녀는 민생의 안정에 주력하여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는 구휼정책을 활발히 추진하였고 불교를 널리 장려하여 분황사, 영묘사등 절을 많이 건립하고 불경을 연구시켜 불교의 일대 부흥을 일으켰습니다.

     

    선덕여왕 재위시기에 축조된 첨성대는 술병과도 같으며 또한 치마를 입은 여인의 모습으로 아름다운 곡선의 묘를 살린것도 선덕여왕의 미적인 감각이 많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첨성대와 선덕여왕의 관계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며 첨성대를 통해 당시의 선덕여왕의 심정을 되집어보며 찾아보는 것도 첨성대를 찾는 또다른 묘미를 맛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밝은 낮에 첨성대를 보는 것도 좋지만은 밤에 첨성대를 보는 것도 참 의미 있다 생각이 듭니다. 언젠가 첨성대에 조명이 꺼지는 날에 별과 함께 첨성대를 담아보는 것도 참 좋을 듯 합니다.  선덕여왕을 생각하며 바라보는 첨성대의 의미는 더욱 살갑게 다가오는 매력을 발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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