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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여행] 지금까지도 부의 모범을 보인 300년 경주 마지막 부자였던 최부자집을 가서 부자의 도를 배우다.
    나의 여행이야기/경상도 2012. 4. 4. 07:00

     

     

     

     

     

    보통 아무리 부자라도 3대를 넘기기가 힘이듭니다.  그만큼 재물이 아무리 많아도 그 쓰임을 재대로 활용을 못하거나 더 큰 욕심이 끝내 화를 부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 10대를 이어 부를 유지한 300년 경주 마지막 부자였던 최부자댁에가서 부자의 도를 배워 봅니다.

     

    경주시 교동에 위치한 최부자댁은 최치원의 17대 손인 최진립과 그의 아들 최동량이 터전을 이루고 손자인 재경 최국선으로부터 28대 손인 문파 최준에

    이르는 10대 약 300녕 동안 부를 누린 일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부불삼대(富不三代)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고 하였던가요?  부와 권력은 오랫동안 유지하기 힘들다는 이야기인데 어찌 이곳 최부자댁은 자그만치 10대를

    이어 그 부와 명예를 이어오며 남들로 부터 칭송을 들을 수가 있었을까요?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 특권계층의 사회적 책임)의 실행을 묵묵히 이어오고 있었던 그들의 덕행은 집안 대대로 내려오고 있던 가훈이 중심을

    잡아 대를 이어 선조의 유지를 받들어 실행에 옮긴 가풍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집안을 다스리는 제가의 가훈으로 육훈이 있고, 자신의 몸을 닦는 수신의 가훈으로 육연이  바로 그것입니다.

     

    육훈을 살펴보면

    과거를 보되, 진사이상은 하지말것

    재산을 모으되 만석이상은 모으지 말것

    찾아오는 과객은 귀천을 구분하지 말고 후하게 대접할 것

    흉년기에는 재산을 늘리지 말것

    시집 온 며느리는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을 것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이가 없을 것' 이 육훈입니다.

     

    육연을 살펴보면

    자처초연(自處超然) -  스스로 처신함에 있어 초연하게 처신을 해야 한다.

    대인애연(對人靄然) - 남을 대할 때 온화하게 대하고

    무사징연(無事澄然) - 일이 없을 때 맑게 지내며

    유사감연(有事敢然) - 유사시에는 용감하게 대하고

    득의담연(得意淡然) - 뜻을 얻었을 때는 담담하게 행동하며

    실의태연(失意泰然) - 실의에 빠졌을 때는 태연하게 행동한다.

     

    이렇게 대대로 내려오는 가훈을 충실히 이어 온 최부자댁 그 실천이 있었기에 10대를 이어올 수 있었고 대대로 칭송을 받았던 것이었던 겁니다.

     

     

     

     

    이토록 대대로 부를 이어온 최부자집에서도 완전한 복을 갖추지는 못했답니다.  대대로 후손이 귀해 많은 자손들을 거느리지 못했고 심지어 후손이 없어

    양자까지 들이기도 하였답니다.  하지만 그것이 나쁘지만은 않았던 것이 자손이 귀했기에 물려주는 재산이 나뉘지 않았고 또한 그러했기에 선대의 유지를

    더욱 귀히 받들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100여명의 색객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었다는 최부자집의 사랑채.  본래 최부자집은 99칸의 대저택이었다고 합니다.  1970년에 화재로 소실한 사랑채는

    근간에 새로 지어졌다고 합니다.

    또한 00석이 들어간다는 최부자집 곳간은 자그만치 7채가 있었다 합니다. 서기 1671년 현종 신해년 삼남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경주 최부자 최국선의 집

    바깥마당에 큰 솥이 걸렸고 '모든 사람이 굶어 죽는 마당에 나 혼자 재물을 가지고 있어 무엇하냐'며 곳간을 열어 큰 솥에는 매일같이 죽을 끓였고, 인근은

    물론 멀리서도 굶어 죽을 지경이 된 어려운 이들이 소문을 듣고 최부자집을 찾아 몰려 들었답니다.

     

    흉년이 들어도 경주 인근에서는 주린자를 먹여 살리는 최부자집을 찾아가면 살길이 었었던 것 입니다.  그해 이후 이 집에서는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라는 가훈이 덧붙여 지었다 합니다.  이렇듯 최부자집은 한 해 소비되는 쌀의 1/3은 자신들이, 1/3은 과객의 대접으로, 1/3은 빈민의 구휼에

    힘을 썻던 것 입니다.

     

     

     

     

    이제 이 집은 최씨집안의 소유가 아닙니다.  이 집은 영남대학교 소유로 되어 있는데 집안 행사째만 이곳으로 모여 의례를 지낸다고 합니다.

    이 집의 마지막 최부자는 최준이라고 합니다. 호는 문파(汶坡)입니다.  호는 의천왕 이강이 이 집에 며칠 머물면서 지어준 것이라 합니다.

    1884년 경주에서 태어난 최준은 단순한 부자가 아니라 상해 임시정부에 평생 자금을 지원한 독립운동가였다고 합니다.  1947년에는 대구에 대구대학을

    설립하여 재단 이사장으로서 현대교육에도 큰 족적을 남겼으며 독림운동 사실이 왜경에게 발각되어 만석꾼 재산을 거의 날려버린 최준은 남은 전 재산과

    살고 있던 경주 및 대구의 집까지 처분해 대구대학과 계림학숙을 세웠는데 이 두학교가 합해져서 후일 영남대학교가 되었답니다.

     

     

     

     

    이제는 전설로 남아 있지만 평생 부의 나눔을 몸소 실천하며 행하기는 오늘날에도 참다운 부의 모범이 되어 남아있고 이곳에 들어서 그 내용을 알았을때는

    저절로 그들의 덕행에 저절로 경의가 표해집니다.

     

     

     

     

     

    이곳은 안채로 현재 이곳을 관리하는 분이 살고 계시며 또한 해설사로 활약하시고 계십니다..

    그분을 통해 최부자집의 내력을 상세히 들을 수가 있었고 말하시는 모습에서 강한 자긍심을 느낄 수가 있는 것을 보아 아마 그 후손이 아닌 가 추측합니다.

     

     

     

     

     

    비록 세월이 흘러 색은 바랬지만 소박하며 깔끔함은 결코 소홀히 하지 않는 가풍이 느껴집니다.

    자신의 것만 지키기 바쁘고 어느 순간인가 나눔의 미덕 보다는 부의 축적을 위해 골목상권까지 침범하는 이시기에 이들의 교훈은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

    그들의 미덕을 느낄 수 있기에 기분좋은 발걸음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어느새 추운 겨울의 찬 바람은 가고 따뜻한 봄의 길목을 알리는 부드러운 햇살이 마루를 비추고 그곳에서는 고양이 한마리가 세월의 흔적이 남은

    그곳에서 태연하게 졸고 있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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