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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여행] 봄볕의 희망이 배어나는 천년의 사찰 마곡사나의 여행이야기/충청도 2012. 3. 1. 07:00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의 태화산 동쪽 산허리에 자리잡은 마곡사는 대한불교 조계종의 제6교구 본사(本寺)입니다. 충청남도 70여개의 사찰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마곡사의 창건연혁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고 조선 철종2년(1851)에 향보(享甫) 이원횡(李源橫)이 쓴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에 의한 기록이 마곡사의 연혁에 대해 밝히고 있는 거의 유일한 자료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에 의하면 마곡사가 위치한 태화산에 자리 잡은 마곡사 터는 동방 제일의 복지로서 선덕여왕이 자장에게 전(田) 200결을 내리고 마곡사를 창건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이어 자장이 당에서 돌아와 7대 가람을 창건하였는데, 마곡사가 그 세 번째라는 것이었답니다. 하지만 의문스러운 것은 선덕여왕 시기 공주 지역은 백제에 속하는 영토로서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감안해 볼 때 자장이 이곳에 절을 창건했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을 수 박에 없는데 현재로서는 다른 내용이 담긴 기록이 발견되지 않아 그 의문점은 아직 풀 수가 없습니다.
창건 이후 이 절은 신라 말부터 고려 초까지 약 200년 동안 폐사가 된 채 도둑떼의 소굴로 이용되었던 것을 1172년(명종 2)에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제자 수우(守愚)와 함께 왕명을 받고 중창하였다 합니다. 보조가 처음 절을 중창하려고 할 때 도둑들에게 물러갈 것을 명하였으나 도둑들은 오히려 국사를 해치려 하였고. 이에 보조가 공중으로 몸을 날려 신술(神術)로써 많은 호랑이를 만들어서 도둑에게 달려들게 하였더니 도둑들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나거나 착한 사람이 되겠다고 맹세했다고 합니다. 도둑들에게서 절을 되찾은 보조는 왕에게서 전답 200결을 하사받아 대가람을 이룩하였고, 당시의 건물은 지금의 배가 넘었으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 불타버렸습니다. 그 뒤 60년 동안 폐사가 되었다가 1651년(효종 2)에 각순(覺淳)이 대웅전과 영산전·대적광전 등을 중수하였고, 일제 강점기의 31본산(本山)시대에는 도내 100여 사찰을 관장하는 본산이 되었습니다. 현재 이 절은 충청남도 70여 개 말사(末寺)를 관장하고 있습니다.
마곡사에 들어서는 입구에 해탈문이 보입니다. 1984년 5월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6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이 또한 제가 아는 상식으로는 약간 이해가 되지않는 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통 해탈문(解脫門)이라고 하는 것은 불이문(不二門)의 또다른 말로 사찰에 들어가는 제일 마지막 문으로 그 문은 부처님의 세계에 이르는 마지막 관문으로 너와 나, 중생과 부처, 미망과 깨달음, 생사와 열반 등 온갖 상대적인 개념들을 초월하여 모든 것이 둘이 아닌 불이(不二)의 경지에 계신다는 사실을 공간적으로 상징해놓은 것으로서, 그러한 곳에 이르는 문이므로 불이문이라고도 하고 그와 같은 경지가 곧 해탈이므로 해탈문이라고도 하는 것이라 알고 있는데 마치 이문은 천왕문 앞에서 금강문의 역활을 하며 금강역사가 이 문을 지키고 있는 것이 특이합니다.
명부전은 지장전, 혹은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부르는데, 주불은 지장보살이며 좌우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협시로 봉안하고 다시 그 좌우에 명부시왕상을 안치하였습니다. 다른 보살상은 화관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지장보살만은 승려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고통을 받는 중생들을 모두 구제하겠다고 한 보살입니다. 왼손에 든 쇠지팡이로는 지옥문을 두드려 열고, 오른손의 구슬로는 어두운 세상을 광명으로 비추겠다는 의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명부전은 역사적으로 오래된 건물은 아니지만 가람 배치 때에 반드시 갖춰야 하는 불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의 건축물이지만 건축의 양식적 특징은 조선 후기 소규모 다포식 팔작지붕으로, 당시 건축의 기술적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명부전 옆에는 무슨 건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신발들이 여럿 있는 걸로 보아 신도들의 휴식처가 아닌가 추측이 됩니다.
이제 극락교를 건너 본당으로 향할까 합니다. 아직 겨울이 지나지 않았음을 알려주듯이 마곡천의 물들이 얼어 있습니다. 조만간 봄이오면 맑은 물소리를 내며활기차게 흐르겠지요. 그날이 멀지 않은 듯 합니다.
대광보전앞에 있는 오층석탑은 풍마동다보탑(風磨洞多寶塔)이라고도 하는데, 인도에서 가져온 것이라고도 하나 라마교 탑과 비슷하여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탑은 임진왜란 때 무너져 탑 안의 보물들이 도난당한 지 오래이나 1972년에 수리할 때 동제 은입사향로와 문고리가 발견되었답니다. 전 국민의 3일 기근을 막을만한 가치가 있다는 전설이 있으며, 한국·인도·중국 등 세계에서 3개밖에 없는 귀중한 탑이라고 합니다.
1984년11월30일 보물 제 799호로 지정되어 있고 1782년 대광보전 화재 때 많이 파괴되었으나 현재 화강암으로 보수되어 있으며 1972년 탑을 해체·보수할 때 향로와 문고리가 발견되었습니다. 만들어진 시기는 머리장식의 독특한 모습으로 보아 원나라의 영향을 받았던 고려 후기 즈음으로 여겨진답니다. 즉 고려 후기 당시 원나라와의 문화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라마교 계통의 문화도 고려에 들어오게 되는데 이 탑은 그 문화의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상륜부의 축소된 라마탑은 이 탑이 밀교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잇는 부분이라고 할 수가 있다고 합니다.
마곡사는 김구선생과도 인연이 깊습니다. 김구는 대한제국때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일본인 장교 스치다조스케를 안악군 치하포나루에서 죽인 뒤 붙잡혀 인천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탈옥하여 이곳 마곡사로 와 원종이라는 법명으로 승려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대광보전 마당에는 조국의 광복을 기리는 향나무가 남아있습니다. 나무 옆에는 '김구는 위명(僞名)이요 법명은 원종(圓宗)이다'라고 쓴 푯말이 있습니다.
대광보전 뒤로 우뚝솟은 대웅보전은 조선 후기의 목조건물로 보물 제801호입니다. 1651년과 1842년 등 몇 차례의 중수 및 개수로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답니다. 앞면 5칸, 옆면 4칸의 1층과 앞면 3칸, 옆면 3칸의 2층으로 구성되어 있는 팔작지붕의 중층건물입니다. 건물 내부에는 높은 기둥이 층마루없이 곧게 늘어서 있고 천장은 우물천장입니다. 현판의 글씨는 김생(金生)이 직접 쓴 것이라고 전해집니다. 이 법당은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약사여래불·아미타불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 건물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병화(兵火)로 소실된 것을 조선(朝鮮) 효종(孝宗) 2년(1651)에 각순대사(覺淳大師)와 당시의 공주(公州) 목사(牧使)가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라 합니다.
마곡사 대광보전은 보물 제80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마곡사의 중심 법당으로 해탈문·천왕문과 일직선으로 놓여 있습니다. 진리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건물로 처음 지은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불에 타버렸던 것을 조선 순조 13년(1813)에 다시 지은 마곡사의 정전(正殿)으로 높이 약 1m의 자연석 기단 위에 세워졌습니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입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앞면 5칸에는 3짝씩 문을 달았는데 문살은 꽃 모양을 섞은 조각으로 장식하였고 가운데 칸 기둥 위로 용 머리를 조각해 놓았습니다.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꾸몄고, 불단은 서쪽으로 마련하였는데 불단 위에는 불상을 더욱 엄숙하게 꾸미는 닫집을 정교하게 꾸며 달았습니다.
공포는 외3출목(外三出目), 내4출목(內四出目)이며 쇠서는 끝이 날카롭게 위로 뻗쳐 있고 그 위에 연(蓮)봉이 장식 되었으며, 봉황(鳳凰)머리의 운공(雲工)도 첨가되었습니다. 전면의 3분합문(三分閤門)에는 꽃모양의 장식이 가미되고 내부도 2단의 우물천장에 연화문(蓮華紋)·운학문(雲鶴紋)이 그려져 있으며, 불상(佛像) 위에는 섬세한 조각의 닫집이 있어 공간구성을 한층 풍성(豊盛)하게 해 준다. 전면 어칸(御間) 기둥머리의 용머리 조각은 내부의 화려한 구성과 함께 건물 전체를 풍만한 장식으로 가득 채워 주고 있다. 장식적 특징을 잘 살린 조선(朝鮮) 후기(後期) 건축의 걸작품의 하나라고 합니다.
안팎으로 구성과 장식이 풍부하고 건축 수법이 독특한 건물로 조선 후기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대광보전 마루에는 나무껍질로 만든 30평 정도의 삿자리가 있습니다. 이 자리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집니다. 조선 후기에 이름 없는 앉은뱅이가 이 절을 찾아와서 부처님께 백일기도를 드렸답니다. 그는 불구를 고치기 위해서 백일기도하는 동안 틈틈이 이 삿자리를 짰다고 합니다. 이 삿자리는 참나무를 한 끝에서 잇고 또 이어 한 줄로 완성한 것인데, 그는 이 자리를 짜면서 법당에 봉안된 비로자나불에게 자신의 불구를 낫게 해줄 것을 기도하였답니다. 백일 뒤 일을 다 끝내고 밖으로 나가는데 자신도 모르게 일어서서 법당문을 걸어나갔다고 합니다.
비로자나불 뒤로 돌아들어가면 후불벽에 백의관음도가 그려져 있는 것이 보입니다. 관음보살이 물결이 넘실거리는 해상 위의 기암괴석에 앉아 머리 위에서 부터 아래로 백색의 장포를 입고 정면을 향해 반가좌를 한 모습입니다. 두광과 신광을 갖추었으며 상호는 초승달 모양의 둥근 눈썹에 꼬리가 위로 올라간 가늘고 긴 눈, 두툼한 코에 작고 붉은 입술을 표현했습니다. 양손은 반가좌한 오른쪽 다리 위에 자연스럽게 올려놓았고, 맨발인 상태의 왼쪽 발은 홍련의 청록색 연밥을 밟고 있습니다.
옷자락 사이로 빠져나온 긴 머리칼이 양쪽으로 3갈래씩 드리워져 있으며, 입상의 화불(化佛)이 표현된 보관을 쓰고 목에는 영락(瓔珞)으로 장식했습니다. 옷자락의 주름을 비롯해 연꽃의 꽃잎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매우 섬세하게 그렸고. 또한 보살의 양쪽 반석위에는 관음보살을 향해 합장 배례하는 남순동자가 화면 우측에 버들가지가 꽂힌 흑색의 정병이 좌측에 그렸습니다. 배경을 이루는 부분은 모두 먹으로 표현한 것도 눈여겨 볼만하고. 암벽의 세밀한 단층과 명암표현에서부터 굽이치는 물결과 포말, 우측상단에 표현된 대나무 잎 등 섬세한 묘사는 벽화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마곡사의 벽화를 대표하는 그림이기도 합니다.마곡사 한쪽에서는 템플스테이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산사의 여유'란 제목으로 운행중인 템플스테이는 평상시 접해 보지 못했던 사찰문화를 경험 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조용하며 맑고 깨끗한 산사의 공기를 마시며 자신을 돌아보고 마음을 열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듯 합니다. 가지런히 놓여 있는 신발들, 이미 이곳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템플스테이를 하고 있어 보입니다. 저도 기회가 된다면 한번쯤은 템플스테이를 해보고 싶습니다.
세월의 흔적들을 여기저기서 찾을 수 있는 마곡사 경내..비록 낡아 색이 바래졌지만 그만큼의 연륜이 느껴지고 편안하게 다가와 더욱더 정감이 가는 곳입니다. 전부터 벼르고 별렀던 마곡사의 첫걸음..이제서야 딛게 됩니다. 다음에 올때는 더욱 느긋하게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마곡사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겠지요.
그리 길지 않은 시간동안 둘러보느라 아쉬운 감이 매우 크지만 그또한 다시 찾아 올 구실이 되기에 실망치 않고 첫발을 딛었다는데 더욱 큰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찾아 올 때의 설렘은 포근한 만족감에 미소를 띄우고 약간의 아쉬움은 또다시 방문할 그날을 상기하며 기쁜마음으로 돌아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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