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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여행] 찬란했던 백제문화의 천년의 꿈과 향기가 고스란히 담긴 익산미륵사지나의 여행이야기/전라도 2012. 1. 30. 19:05
세기의 스캔들 백제무왕의 서동요
예로부터 사랑하는 여인을 쟁취하고자 하는 남자의 노력은 계속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백제 30대 군주였던 무왕 역시 신라의 선화공주를 사랑하여 서동요를 만들고 마침내 그 사랑을 이루었다는 이야기는 오늘날 드라마의 소재로 널리 쓰일만큼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신라 진평왕시절 당시 마를 팔며 살았던 서동. 그는 진평왕의 셋째딸이자 신라최초의 여왕인 덕만과 김춘추를 낳은 천명공주의 동생인 선화공주를 사랑하여 서라벌에 잠입하여 궁중주변의 아이들에게 마를 나눠주며 지신이 지은 노랫말을 가르치고 부르게 하였습니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정을 통해 두고 맛둥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가다" 당시에는 있을 수도 없는 크나큰 스캔들에 휘말려 선화공주는 궁에서 쫓겨나고 유배길에 나타나 그간의 사정을 폭로한 서동을 따라 백제로 향하게 됩니다. 그 후 이들 부부는 오금산에서 금 다섯덩이를 캐어 진평왕에게 전하고 장인과 사위의 관계가 회복되었다 합니다. 이렇게 서동은 신라왕의 지지와 선화공주의 내조 그리고 그를 지지하는 지역민심을 기반으로 백제 30대 왕이 되었다고 삼국유사는 전하고 있습니다.
자취만 남은 미륵사
익산 금마면 가양리에 위치한 미륵사지. 이곳은 백제 무왕때 왕비의 발원으로 세워진 사찰입니다. 현재 절터만 남아 있으며, 사적 제150호 익산미륵사지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백제무왕이 왕비와 함께 사자사(獅子寺)로 향하고 있을 때 큰 연못에서 미륵삼존불이 나타나 왕비가 이곳에 절을 세우기를 소원하여 만들어진 사찰이 미륵사 입니다.미륵사는 백제사원의 전형적인 사찰로 남에서부터 중문, 탑, 금당, 강당을 배열하여 중문과 강당사이를 연결한 회람으로 둘러막은 소위 1탑식 사찰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찰을 동서로 나란히 3개소를 지었으되 강당은 중앙 우측에 하나만 두어 공동으로 사용하였답니다. 각 사찰 마당에는 탑을 건립하였는데 중앙에 있는 목탑이 가장 컸으며, 좌우에 있는 탑은 석탑으로 세웠는데 현재 서탑만이 남아 있고 동탑은 소실되었으나 복원되었습니다.
서동요 설화가 허구로 변한 아이러니
2009년 1월 미륵사지 서탑 안에서 사리병과 금판 모양의 봉안기록이 발견되었습니다. 삼국유사에 전해진 바는 미륵사는 무왕의 왕비 선화 공주의 발원에 의해 용화산 아래 건립되었다 하였는데 봉안 기록에는 좌평 사택적덕의 딸 출신의 백제의 왕비가 건립을 발원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의 내용에 충실하자면 선화공주와 무왕의 러브스캔들은 실화가 아닌 만들어진 이야기거리에 불구할 수 밖에 없어 역사를 재 조명하여야 하는 러브스캔들이 아니라 역사 스캔들이 되어 버립니다.
시대를 아울러 한참 복원중인 미륵사지를 찾아옵니다. 다소나마 추운 겨울의 쌀쌀한 기온이 물러나고 영상의 기온이 포근한 토요일 오후.. 아직은 복원중이라 미완성인 이곳은 한적하기만 합니다.
천년여의 시간이 흘렀으나 그 당시의 흔적들이 남아있는 이곳 미륵사지는 미미하게나마 미륵불이 이세상에 내려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불심이 전해져 오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출입구를 지나면 바로 보이는 동탑의 모습.. 이미 소실되어 없어진 탑을 화강암으로 복원한 석탑입니다. 물론 애뜻한 불심으로 직접 정으로 쫗아 만든 석탑과는 비교할 수 없으나 그나마 그 당시에 이런 석탑을 만들었었다는 상징성은 통하리라 생각이 듭니다.
장엄히 위엄을 드러내며 굳건히 서 있는 보물 236호 미륵사지당간지주
당간(幢竿)은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 사찰입구에 세운 기둥입니다. 돌로된 두개의 당간 지주사이에 동(銅)이나 철(鐵)로 만든 막대기 모양의 기둥을 세우고 불가(佛家)를 상징하는 깃발인 당(幢)을 꽃아 신성불가침 지역임을 표한한 것입니다. 사찰의 당은 그 자체가 위엄이어서 당간의 규모가 사세(寺勢)를 드러냈기에 큰 사찰일수록 높이 세웠다 합니다.
서탑의 모양을 따라 만든 동탑의 위용도 크고 웅장합니다. 비록 화강암에 기계로 깍아 만든 석탑이어서 밋밋하기만 하지만 이런 규모의 탑을 손수 망치와 정으로 만들었을 그 당시의 탑을 연상하면 그 노력과 예술혼에 찬사를 보낼 수 밖에 없습니다.
승방지 터
동서 승방지는 남북 65m, 동서 14m 정도로 같답니다. 동서 승방지 내부에는 한변 6m 크기의 방 두개가 남북으로 한 조를 이뤄 4조씩 있답니다. 발굴당시 동원의 승방지에는 구들시설과 아궁이의 흔적이 있었지만 완전한 구조가 남아 있지는 않답니다. 이곳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크고 작은 항아리를 비롯하여 주름무늬 토기병, 돋음 무늬 병, 불에 탄 곡식 및 중국 당나라의 백자완 등이 출토되었답니다.
강당지는 여러사람이 모여 불경을 읽거나 불교의식을 행하던 곳입니다. 중원 목탑과 금당지를 지나는 남, 북 중 심축선상의 금당지 북쪽에 있으며 강당지 동, 서쪽에는 동, 서평 승방지에 연결되는 접랑지(接廊址)가 있고 강당지의 북쪽 석축의 북쪽에도 북 승방지가 있답니다. 강당지는 미륵사지의 다른 건물지에 비하여 건물기단이 잘 남아 있는데 동서 길이 65.65m(동서 13칸), 남북 폭 19.8m(남북 4칸)이고 면적은 394평 내외라 합니다. 계단은 남쪽 면에 3개, 동, 서쪽면에는 각 2개씩 모두 7개가 있답니다. 북쪽 면에는 북승방지로 연결되는 복도시설의 기초석 6매가 남아 있답니다. 강당지 중심축 북쪽에 복도시설이 있는 곳은 백제시대 절터로 부여 금강사지(金剛寺址), 군수리사지(軍守里寺址)가 있고, 신라시대의 절터로 황룡사지(黃龍寺址)가 있답니다.
복원공사중인 국보 제11호인 미륵사지석탑(서탑)
허물어진 서탑을 복원하고자 해체하는 과정 중 발견된 사리병과 금판모양의 봉안이 발견되고 사리병에는 연꽃, 당초, 인동초 무늬가 정교한 음각으로 가득 새겨져 있고 이는 백제 금동대향로에 필적하는 백제 공예품의 걸작으로 불리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미륵사지에는 1만여점의 유물이 발굴되어 당시의 문화상과 역사의 흐름을 파악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답니다. 전체를 복원하지는 않고 봉괴되었을 당시 6층 높이의 모양 그대로를 복원하기로 하여 진행중인 공사는 2016년 완공을 목표로 두고 있습니다. 이미 2010년 잠정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있어 국제 기준의 보수 복원에 충실하기로 하여 9층 높이의 원래 모습은 재현 할 수 없지만 해체전의 모습이나마 복원하여 그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것만 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미륵 삼존불의 출연으로 절을 짓게 되었다는 창건동기를 지닌 미륵사는 미륵이 이세상에 와서 세번의 설법을 하기위해 3군데의 장소를 마련하고 미륵이 머무를 장소로 금당에 지하공간을 설치하였다는 점 그리고 3탑 3금당의 가람배치가 미륵삼존불의 재현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백제왕권 강화와 민심을 수습하고 정치적 안정을 꿈꾸는 무왕의 간절한 바람이 깃들어져 있음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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