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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의 박물관] 제주여행시 꼭 찾아가봐야 할 국립제주박물관
    문화리뷰/박물관·전시관 2019. 6. 23. 16:20




    제주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국립제주박물관 



    제주에 살면서 한번 들려본다 하면서도 미루기만 하였던 국립제주박물관을 자료도 찾을 겸 모처럼 찾아가 봅니다. 여행을 하면서 그 지역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곳이 바로 박물관인줄 알면서도 정작 3년동안 제주에 살면서 찾아가지 못했던 것은 게으름이었다는 것을 여실히 느끼며 늦게 나마 찾아 본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을 해 봅니다.


    국립제주박물관은 제주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다양한 자료와 유물을 수집·보존하는 한편, 체계적인 전시와 학술조사·연구를 목적으로 2001년 6월 15일 처음으로 문을 연 고고역사박물관입니다. 전통 제주초가의 형태를 기본으로 건축을 하였고 다채로운 전시와 각종 체험교육 및 문화공감 프로그램의 지속적 운영을 하고 있어 조금 독특한 제주의 문화를 이해하기가 쉬워 제주여행의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이 듭니다.





    평일에는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까지 운영을 하며 토요일 및 공휴일은 오후 7시까지 한 시간을 연장하고 있습니다. 매 주 월요일에 휴관을 하니 이 점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제주시 건입동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1132번 일주도로가에 있어 찾아가기도 쉽습니다.





    제주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상설전시실은 탐라에서 제주까지라는 캐치프라이즈를 걸고 구간을 나눠 전시를 하고 있으며 그리 큰 규모는 아니지만 소소한 제주의 역사와 문화를 알아가는 재미가 있습니다. 선사실, 탐라실, 고려실, 탐라순력도실, 기증실, 조선실등으로 구분되어 있어 시대별로 제주의 흐름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선사실


    제주 선사문화의 전개와 발전과정을 살펴보는 곳으로 화산섬이었던 제주의 탄생과 첫 제주인의 정착과정에 대해 알 수가 있고 구석기시대부터 탐라국이 탄생하기 전까지의 문화발전상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전시실 중앙에 자리잡은 청동기시대의 삼양동유적을 복원해 만든 모형을 통해 당시의 선사시대의 삶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제주의 청동기문화는 한반도 중남부지역과의 지속적인 영향하에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해안일대 구릉지에 마을을 형성하면서 네모꼴, 혹은 긴네모꼴의 구덩이를 파고 기둥을 올린 움막을 지었으며, 구멍무늬토기와 같은 민무늬토기를 만들어 사용하였으며 요령식동검과 간돌칼등은 한반도로부터 교류를 통해 소유하였다고 합니다. 제주시 삼화지구유적과 제주세무서부지유적, 서귀포시 상모리유적등이 이시기에 해당되는 유적들이며 신석기시대와는 달리 마을을 이루며 모여 살았음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조금 독특한 제주의 무덤 지금으로부터 2,000년전 제주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큰항아리에 시체나 뼈를 넣어 묻었는데 이를 독무덤이라 불렀답니다. 이 독무덤은 지금까지 발견된 것들 중 제주지역에서 가장 이른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큰 토기 항아리 2개를  서로 맞붙여 관으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제주에서는 제주시 용담동유적, 삼화지구유적, 서귀포시 화순리유적 등에서 독무덤이 발견되고 있어 당시 이 무덤양식이 제주지역 전체에 유행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고 합니다. 


     제주지역의 선사시대무덤은 고인돌, 독무덤, 움무덤등이 있으며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일반적인 무덤이지만, 제주지역에서는 초기철기시대에 유행하였다고 합니다. 대형 덮게 돌을 운반하여야 하는 무덤이므로 공동체의 규모가 일정 수준이상 성장하였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고 하고 용담동 고인돌을 비롯하여 제주지역에서는 200여기 가량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고 합니다.

    움무덤은 특별한 매장시설 없이 땅을 파고 주검을 묻는 것으로 초기철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이라고 합니다. 제주에서는 삼화지구유적에서 유일하게 조사되었다고 합니다. 무덤 내부에서 덧띠토기와 간돌칼, 유리구슬등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고 합니다.





    탐라실


    제주만의 독특한 문화가 완성되고 꽃을 피웠던 탐라시대를 보여줍니다. 탐라국의 탄생과 주변국가들의 교류를 통해 성장하는 모습을 발굴유물로 살펴보고, 탐라국의 문화에 대해 알아 볼 수가 있습니다.





    탐라는 한반도의 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에 해당되며, '탐라(耽羅)'라는 명칭은 5세기의 「삼국사기」의 기록에 처음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전의 「삼국지(三國志)」「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마한조의 '주호(州湖)'에 대한 기록으로 볼 때, 그에 앞서 이미 제주에 독자적인 세력이 형성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탐라국의 형성은 여러 중소집단의 통합과 결속이 커졌음을 의미하며, 동일한 양식의 토기가 확산되고 지배자의 무덤이 등장하는 것에서 알 수가 있다고 합니다. 아가리부분이 넓게 벌어진 곽지리토기는 2세기 전후에 제주 전역에서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인구가 급증하고, 이를 통제할 수 있는 지배계층의 출현을 증명합니다. 삼국시대 후기에 이르면 탐라는 백제 · 신라 · 일본 · 당등 대외에 널리 알려지며 국제적인 역량을 높이는 한편, 활발한 해상활동을 전개하였다고 합니다.



    고려실


    한반도의 통일왕국 고려와 탐라가 하나의 나라가 되면서,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는 제주의 문화를 보여줍니다. 화려한 도자문화의 유입과 융성했던 불교문화, 아시아의 거국과 당당하게 맞서 싸웠던 대몽항쟁의 역사를 생생하게 볼 수가 있습니다.




    고려가 성립하자 탐라국의 통치자들은 고려로 부터 성주의 작위를 받아 반독립적상태로 탐라국을 통치하였습니다. 이후 1105년 고려의 정식 행정구역인 탐라군(耽羅郡)으로 전환되었고, 13세기 초에는 제주(濟州)로 개칭되는등 점진적으로 고려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제주는 고려와 초기부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므로 고려로 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특히 고려의 불교가 제주에서도 융성하여 비보사찰이었던 법화사를 비롯하여 많은 사찰들이 새워졌으며, 도자문화등 다양한 선진문물이 신속하게 유입되었습니다. 한편, 고려후기 대몽항정기에는 삼별초의 마지막 저항지로써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삼별초가 평정된 후, 제주는 일시적으로 중국 원의 통치하에 놓여졌는데 이때 말을 사육하는 대규모의 국립목장이 설치됨으로써 오늘날 제주말(濟州馬)문화가 형성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제주에 불교의 흔적이 확인되는 것은 고려시대로, 법화사(法華寺), 수정사(水精寺), 원당사(元堂寺), 존자암(尊者庵)등이 대표적인 절입니다. 이 절들은 발굴된 유물들을 통해 고려시대에 세워져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왔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수정사 터에는 고려전기의 청자편이 발견되어 비교적 이른시기에 절이 세워졌음이 밝혀졌으며, 법화사 터에는 중국 원과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기와 및 중국도자기들이 출토되었습니다. 

    이밖에도 원당사 터 5층석탑, 존자암 터 출토유물, 수정사 터 출토 석탑재 등을 통해 제주의 불교가 융성했음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서민층 사이에는 미륵신앙과 현세의 복을 구하는 토속화된 불교신앙이 유행되었다고 합니다.

    고려는 1231년 몽골군의 침입으로 인해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몽골에 저항하였습니다. 그러나 1270년 고려는 결국 몽골에 패배하여 개경으로 돌아왔고 이때부터 몽골의 지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부정하고 몽골과의 대항은 선언한 집단이 삼별초(三別秒)입니다. 삼별초는 강화에서 진도로 거점을 옮겼으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다시 제주로 옮겨와 항파두리에 성을 쌓고 저항하였습니다. 이 때 제주민들 가운데 고려의 통치방식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삼별초의 대몽항쟁에 적극 가담하였으나, 1273년 여 · 몽연합군의 대규모 공격을 받은 삼별초는 결국 패하였고 40년에 걸친 저항의 역사는 제주에서 막을 내렸습니다.





    탐라순력도실


    300년전 제주의 모습을 고스란히 기록해 둔 탐라순력도를 통해 조선시대 제주인들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정보검색 코너를 통해 탐라순력도의 학술적 가치에 대해서도 깊이 이해를 할 수가 있습니다.





    보물 제 652-6호 탐라순력도는 제주목사 이형상(李衡祥 1653~1733)의 탐라순력기록으로 그의 명을 받은 김남길(金南吉)이 1703년 화첩으로 제작하였고 1702년 10월 29일부터 11월 19일까지의 기간동안의 순력일정을 제주전도 1면과 행사장면 등 40면을 화첩에 옮긴 그림에 관한 기록입니다.


    조선실




    제주만 그린 지도로서 가장 오래된 지도는 1702년 제작된 탐라순력도(眈羅巡歷圖)에 실린 한라장촉(漢拏壯矚)이고 이는 조선시대 말기에 만들어진 동여도(東輿圖),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등 전국지도에 그려진 제주지도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옛 지도에 나타난 제주에는 한라산이 공통적으로 보이며, 행정구역과 방어시설인 진성(鎭城)등이 표시되어 정치 군사적인 목적에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한편, 서영의 지도속에 제주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때는 16세기 후반이며, 17세기 이후의 서양지도에서는 제주도가 풍마도(I.Fungma), 퀠파트(Quelpart)등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중 풍마도는 '말이 풍부하다(豊馬)'는 뜻의 한자어를 빌린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시대 제주도에는 왕족으로부터 일반관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유배되었습니다. 조선말기 제주로 유배 온 김윤식이 쓴 「속음청사(續陰晴史)」에는 "제주목의 유배인들이 나날이 늘어나 마치 섬 전체에 가득 찬것 같다"라고 쓰여 있어 당시 유배지로서의 제주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제주로 유배 온 사람들은 왕족과 외척, 양반 사대부, 승려, 도적 등 계층이 다양하였습니다. 그 중에는 사화와 당쟁의 여파로 유배온 정치가들도 많았는데, 그들 중 성리학을 사상적 배경으로 삼은 학자들은 유배기간 중 많은 시문을 남기거나 교육장소를 마련하여 제주사람들에게 학문과 예의범절을 가르치는 등 제주지역 문화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대표적인 유배인으로는 충암 김정,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추암 김정희, 면암 최익현 등을 꼽을 수가 있습니다. 



    탐라에서 제주까지 크지는 않지만 알찬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어 좀 더 제주문화에 대해 가가이 접근을 할 수가 있었고 제주를 둘러볼 때 더욱 더 친근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가 있어 많은 도움이 됩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고 하였던가요? 전에는 무심코 지나갔던 풍경들이 소중히 하나하나 눈에 들어오고 그들이 전하는 역사의 이야기들을 귀기울여 들을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필요했던 자료들도 조금 시간이 지났지만 받을 수가 있었고 제주에 조금 더 가까이 갈 수가 있는 계기가 되었던 국립제주박물관은 제주 여행시 꼭 들려볼만한 소중한 곳이라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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