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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산여행]야은 길재선생을 모신 사당 청풍사
    나의 여행이야기/충청도 2012. 6. 8. 07:00

     

     

     

     

     

     

     

     

     

     

     

     

     

    '아름다운 냇물이 흐르는 곳'의 순 우리말인 '진내' 또는 '진례'라는 의미를 가진 진내군(進乃郡)과 진동현(珍同縣)을 통합한 금산군에는 금강의 맑은 물이 흐르는 곳에 붉은 빛깔의 바위가 마치 강물을 붉게 물들게 하는 것 처럼 보인다 하여 이름 지어진 적벽강이 있습니다.  그 길을 가는 길목에 부리면불이리에 위치한 야은 길재선생을 모신 사당 청풍사가 있습니다.  조선 영조 33년(1757) 당시 금산군수 민백흥이 지방 유림들의 협조를 얻어서 건립했는데, 영조 37년(1761) 예산 출신 대학자인 윤봉구(1681~1767)가 짓고, 윤봉오가 글을 쓴 야은 선생 ‘불이유허비(不二遺墟碑)’를 세우고 야은 선생이 이곳에 정착하게 된 유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그 옆에 ‘백세청풍비(百歲淸風碑)’와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를 세우고 선생의 행적이 백이·숙제와 같은 불사이군의 충절을 밝힌 청풍명월의 기상이라고 했고, 이것은 일찍부터 청풍명월의 의미가 올곧은 선비정신을 뜻한다고 하는 사기열전 중 백이·숙제의 고사에서 연유했으며, 고고한 선비들이 즐비하게 태어난 충청도를 ‘청풍명월의 고장’이라는 별칭의 유래가 되었다고 합니다.

     

     

     

     

    야은 길재는 고려후기 문신이자 고려 말 조선 초의 성리학자입니다.  본관은 해평, 자는 재보 (再父), 호는 야은(冶隱) 또는 금오산인(金烏山人)입니다. 목은 이색과 더불어 포은 정몽주와 함께 고려말의 삼은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고려가 망하자 관직을 버리고 선산에 낙향하여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을 하였으며 김숙자, 최운룡, 김종직 등을 통해 사람파로 학맥이 계승되었다고 합니다.  개경에 살던 1370년 당시 저명한 이색, 정몽주, 권근 등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고, 우왕 9년(1383) 문과에 합격하고 그 해  금산에서 중랑장 신면(申勉)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갑자기 부친이 죽자 3년상을 지낸 뒤, 우왕 12년(1386) 청주목 사록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음해 성균관 학정(정8품)이 되고 계속 그곳에서 승진을 해가며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고려가 쇠망해짐을 느끼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 선산으로 낙향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 조선이 건국된 뒤 정종 2년(1400년)에는 이전부터 절친하던 세자 이방원이 그에게 태상박사 벼슬을 내렸지만,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고 개경 부근의 두문동으로 은둔했고'  태종 2년(1402)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불교식 장례법을 따르지 않고 성리학의 가례로 장례했는데, 세종이 즉위하던 1419년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종이 길재의 절의를 기리며 그 자손을 중용하려 할 때, 길재는 자손들이 조선 조정에 출사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고 합니다. 길재의 학풍은 제자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 등에게 이어졌습니다.

     

     

     

     

    야은이 벼슬을 버리고 오로지 학문을 연구하는 그를 본받고 가르침을 얻으려는 학자가 줄을 잇자, 야은이 죽은 지 400여 년이 지난 조선 영조 33년(1757) 이곳에 야은을 기리는 청풍사를 짓고, 김숙자를 비롯한 야은의 제자 김종직·김굉필·정여창·조광조 등을 모셨습니다.  청풍사에는 백세청풍비, 불이유허비, 지주중류비 등 3개의 비석이 있는데(도지정문화재자료 제16호), 특히 지주중류비는 중국 명필인 양청천의 글씨를 한강 이정구가 탁본한 것을 1948년 비석으로 세운 것이라고 하며,  이것은 중국 황하강에 있는 지주라고 불리는 바위는 거친 물살과 탁류에도 흔들리지 않고 굿굿하게 버티며 서있다는 것으로서 사람들은 그 흔들리지 않는 지주바위의 절기를 기려 백이와 숙제의 무덤 앞에 세운 것이라고 합니다.

     

     

     

     

     

    청풍사는 서원을 개설하고 충절공의 높은 충절과 도덕을 이어 받을 인물을 양성한 이외에 본래 마을이름이 부리(富利)이던 것을 불이리(不二里)라고 고쳐 부르게 된 원인이 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고려충신 야은은 조선 태조 3년(1394) 계룡산 동쪽 산기슭에 고려 태조 및 공민왕과 정몽주의 제사를 지냈는데, 그후 1399년 고려의 유신 유방택(문화유씨의 시조)이 이곳에 삼은각(三隱閣)을 짓고 고려삼은의 위패를 모셔놓은 것이 동학사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쉽게도 문이 굳게 닫혀있어 사당과 청풍서원에는 들어가 볼 수는 없어서 담장 밖에서 마치 그리워 하듯이 저 멀리 있는 사당과 서원을 바라볼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세월은 지났어도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던 충신의 드높은 기개는 마치 도도히 흐르는 금강과도 같고

    그의 굳은 의지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그를 기억하고 있으며 그가 남긴 싯 귀절은 오늘날에도 이어져 이곳을 들리는

    사람들의 입에서 읊어져 가고 있습니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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