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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여행] 기호문학의 거두 윤증선생의 명재고택을 가다.나의 여행이야기/충청도 2012. 5. 29. 07:00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호는 명재(明齋),유봉(酉峯), 시호는 문성(文成)인 윤증선생의 고택인 명재고택을 찾아갑니다. 특히 사랑채가 아름다운 이곳 명재고택은 지금도 후손이 살고 있는 살림집으로 조선시대 중기에 지어진 호서지방의 대표적인 양반가옥이기도 합니다. 안채와 사랑채, 대문간채와 사당으로 지어진 전형적인 선비의 집으로 조선후기 숙종때 초라한 집에서 기거하는 것을 보다 못한 윤증선생의 둘째아들과 그의 제자들이 힘을 모아 지은 집이었으나 그거마저 과분하다 하여 잠시 들렸다가 다시 본래 살던 집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세력가의 집으로는 오히려 초라하다고 할 정도의 집이 윤증선생에게는 그마저 선비가 살기에는 화려하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소론의 영수이자 성품이 대쪽같던 그는 임금이 18번이나 벼슬을 내렸지만 모두 거절하여 '백의정승'으로도 불리었습니다.
윤증고택의 또하나의 자랑거리중 하나인 전통장들이 보관되어지고 있는 항아리들의 행렬들 또한 장관이기도 합니다. 특히 300여년을 이어온 씨간장으로 만들어지는 된장과 고추장 드리고 간장등 전국적으로도 유명하여 찾는 이들이 많다고 합니다. 대를 이어온 씨간장을 맛보면 그 끝맛에서 우러나오는 달달함이 전혀 짜지않고 깊은 맛을 내어서 모든 음식의 맛깔스러움을 내는데 일조를 하고 있습니다. 명재고택은 중요민속자료 제190호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명재고택의 대표적인 공간 사랑채는 복합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윤증고택이 지어진 당시에는 성리학적 사고가 확고히 자리잡은 시기였다고 합니다. 개방적이고, 외향적이며 원심적이고, 수직적으로 구성되는 남성의 공간인 사랑채는 마을을 향해 열려져 있습니다. 주거형태를 밖으로 자신감 있게 드러내 보이고 있으며, 한 가족만의 생활공간을 넘어서 마을이라는 공동체로 열린공간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채 누마루에서 마당쪽으로 난 들창을 열면 그 풍경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사각형연못과 인공섬, 교촌리 마을과 멀리 계룡산 암봉까지 한눈에 들어옵니다. 더군다나 이 들창은 지금 시대에서도 적용되고 있는 와이드TV에 적용되는 16:9 의 비율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들창의 높이가 팔을 걸어놓고 편안하게 볼 수있는 30cm높이로 되어 있다는 점이 놀랐습니다.
이곳 누마루에 있다보면 시간이 가는 줄을 모르고 하염없이 머물게 됩니다. 사방이 훤히 뚫린 문들을 통해 시원한 바람이 막힘없이 흐르고 찾아오는 지인이나 객들과 소담스럽게 차 한잔 하면서 소담스럽게 정담을 나누면서 대화할 수 있는 편안한 공간이었을 듯한 느낌이 강렬히 듭니다. 역시 한옥은 밖에서만 들여다 보면 그 진가를 알 수 없고 안에 들어가서 봐야 비로소 느끼게 되는 거 같습니다.
누마루 밑으로 눈을 잠시 내려다 보면 작은 산이 눈에 보입니다. 석가산(石假山)이라는 것으로 뾰족한 돌들을 모아놓아 만든 것인데 금강산을 본 떠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평상시 흠모하던 금강산을 늘 겨에 두고 싶은 마음으로 만든 이 석가산도 역시 누마루에서 내려다 보면 그 느낌자체가 확연히 달리 보입니다. 옆에서 봤을 때의 모습은 그저 돌들을 그냥 쌓아 논 느낌이라면 위에서 보는 느낌은 마치 하늘에서 금강산을 내려다 보는 듯 한 느낌이 들어 그가 얼마나 금강산을 그리워 했는 지를 알 수 있는 풍경이기도 합니다. 시각의 차이에 따라 달리 보이는 석가산..역시 누마루에서 보지 못했으면 이 돌들의 의미를 알 수 없었을 뻔 했습니다.
사랑채 앞에 약간 깨진채로 놓여진 표지석이 보입니다. 일영표준(日影表準)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명재 9대손인 윤하증 선생이 해시계의 영점을 잡아 전체를 관측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성리학자 이지만 실학 사상에 대해 후한 평가를 주었던 윤증선생은 실학의 첫 세대 학자인 윤형원을 높이 평가하였고 서인이면서도 남인인 윤형원의 반계수록을 극찬하였다고 합니다. 그의 학풍이 이어져 대대로 이어져 내려와 실용적인 학풍을 이어받은 9대손인 윤하증 선생은 천문학에 관심을 보이고 그 때부터 음력 대신 양력을 사용하고 제사 역시 양력으로 지낸다고 합니다.
사랑채 왼쪽으로 난 중문을 들어서기 전에 보이는 작은 우물이 있습니다. 향나무로 둘러쌓여 있어 자칫하면 그냥 지나치기 쉬운 이 연못은 이 집 종가댁에서 좋은 맛을 내는 간장의 된장 그리고 고추장의 기본이 되는 이 물을 사용해 만든다고 합니다. 우물의 자리도 '욕녀탄금형'이라 하여 좌청룡, 우백호를 끼고 가운데 샘이 솟는 형상이라고 합니다. 주변에 향나무를 심어 아녀자가 이곳에서 물을 깃는 과정들을 숨기는 역활을 하고 향나무 뿌리는 물을 정화시키는 작용을 하여 물맛 또한 좋다고 합니다.
그리 하기에 이 집 장맛은 전국적으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대를 이어 내려오면서 그 맛을 이어가는 장을 담고 있는 넓은 마당에 쌓인 장독대는 고택의 넉넉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고 바람과 햇살을 받으며 그 세월을 고택과 함께 이어오고 있습니다..그 지나온 세월만큼 고택의 장도 더불어 숙성되어져 가고 있는 것 입니다. 장독이 있는 풍경을 다양한 각도로 잡아봅니다.
이곳 명재고택을 찾아오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바로 이 연못입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형상화한 형식으로 내부에
원형의 섬을 조영하였고 연못은 사각형식으로 조성하였습니다. 평상시에는 조경용으로 사용되다가 농번기가 되면 농업용수로 제공되어진다고 합니다.
지금은 전통가옥 숙박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여 일반인들이 이곳에서 직접 숙박을 통해 고택체험을 할 수 있게 하고 있으며 다양한 전통음악과 다례, 천연염색, 그리고 전통공예처헴읋 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마련되어져 있다고 합니다.
안채는 ㄷ자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정방형에 가까운 마당이 그 가운데 자리잡고 있습니다. 충청지역의 고유한 특색으로 수직형인 사랑채에 비해 안채는 수평적 형식을 가지고 있으며 경상도 지역의 으리으리한 저택에 비하면 소박한 건물의 규모입니다. 전통한옥의 특징은 남성의 공간과 여성의 공간을 대비적으로 조성하여 외관상 분리하면서도 동선상으로 미묘하게 연결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명재고택도 형태상으로는 분리하여 형식미를 갖추면서도 실제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작은 마당과 골방 등 공간요소를 사용해 남성과 여성의 공간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사랑채 옆으로 안채와 외부영역을 나누어 주고 한편으로는 안채와 사랑채를 연결해주는 안행랑채가 있습니다. 외부에서 안행랑채까지 아름다운 돌계단을 타고 오릅니다. 사람의 발길을 자연스럽게 이끄는 길이기도 합니다. 안행랑채까지 이르러도 그 뒤에 있는 안채는 드러나지 않고, 안마당으로 들어가는 중문간에는 ‘내외벽’이라고 해서 가벽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개방적인 사랑채와 달리 내밀한 공간인 안채의 프라이버시를 위한 건축적 장치입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내외벽의 아랫부분이 뚫리어 있습니다. 안채에서는 그 개구부를 통해 방문자의 발을 봄으로써 인기척을 확인하고 옷매무새를 단정히 한 다음 손님을 맞았다고 합니다.
윤증선생 고택의 여러 곳에서 치밀한 디자인과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발견됩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사랑방과 골방 사이에 있는 안고지기 곧 미닫이 여닫이입니다. 미닫이로 열고 다시 문틀과 문짝이 맞물린 상태로 여닫이로 열리는 문, 참 대단한 아이디어입니다. 안채에서 준비된 음식 등을 골방을 통해서 큰방으로 옮기려면 드나드는 문이 넓어야 하므로 이같은 독특한 고안을 하여 방 사이의 칸막이를 완전히 열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이 문은 문지방이 문짝과 같이 여닫혀야 하므로 세부처리가 정교하게 되어야 하는데, 오늘날 건축 디자인의 관점에서 보아도 그 아이디어가 돋보인다고 합니다.
온돌방인 큰사랑채 중심으로 서북쪽에 작은방이 있고, 동 남 서면은 마루로 둘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좌측 모퉁이에 아궁이가 있고 그 위에 누마루가 있어 사랑채의 평면에 등고를 주고 좌측 마루 공간은 측면은 벽과 창으로, 전면은 세 칸 모두 개방시켰습니다. 누마루에서도 작은 사랑방으로 연결이 되어 있고 그 작은 사랑채는 행랑채로 연결되어져 있어 안채에서도 사랑채까지 연결되어지는 동선이 마련되어져 있습니다. 조금 복잡한 사랑채의 내부구조지만 멀리 돌아가는 구조가 아닌 바로 질러갈 수 있는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대부 가옥들이 읍내에서 반나절 정도의 거리에 떨어져 독자적인 근거지를 운영했던 것과는 달리, 윤증고택은 노성읍내와 불과 500m도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만큼 향리의 실질적, 상징적 중심으로 자리매김 되어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위치뿐 아니라 주택의 구성도 향리에 대해 매우 개방적이며, 비록 마을의 제일 끝 깊숙한 곳에 위치했지만, 사랑채 앞 넓은 마당에 연못을 조성했고, 석가산과 우물을 만들었습니다. 여기에는 일절 담장이나 별도의 경계물을 두지 않았고, 꽃나무들로 아늑한 분위기만 조성하였고, 네모난 연못은 향교 앞까지 걸쳐 있어서, 이 집에 소속되었다기 보다는 노성면 전체를 위해 제공하려는 의도가 명확합니다. 사랑 앞마당은 마을에 개방되어 향교에 오는 참배객들의 공동 광장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며, 담장과 행랑을 둘러 안채만 보호하고 나머지 영역은 과감히 향리에 공개하고 있습니다. 향리의 지도자로서 자부심과 자신감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구성이라고 합니다.
윤증고택의 개방성은 세도가의 강요된 위세가 아니라, 윤증이 평소에 주력했던 향촌민의 교화와 보살핌에서 얻어진 자연스러운 카리스마 때문이라 보아야 할 것이며, 또한 향촌에 공개해도 부끄럽거나 감출 것이 없다는 철저한 예학자적 자신감의 결과일 것입니다.'나의 여행이야기 > 충청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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