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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여행]올곧은 신념 막힘없는 개혁정치를 주도한 정암 조광조의 위패를 모신 심곡서원나의 여행이야기/경기 2015. 12. 1. 14:17
경기도 용인시 관내에서 최초로 사액을 받은 서원 심곡서원
심곡서원은 정암 조광조의 위패를 모신 서원으로 전형적인 전학후묘(공부하는 공간이 앞에 있고 제사공간이 뒤에 있는 형식)의 형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서원앞 500m 지점에 그의 묘소가 있는 것이 심곡서원이 세워진 배경이 되었습니다. 효종 원년(1650년) 심곡(深谷)이라는 사액을 받고 이곳에 세워졌고 조광조와 지란지교의 삶을 살다간 양팽손도 이곳에 추가 배향되었다고 합니다.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을 때에도 무사했던 47개 서원 중 하나로 선현들의 제사와 지방 교육을 담당하였습니다. 용인을 둘러보면서 이렇게 옛 선조의 자취가 남아있는 공간에서 몰랐던 역사도 알아가게 되는 뿌듯함은 여행을 하며 느끼는 또 하나의 즐거움입니다.
정암 조광조는 중종 때 도학정치를 주창하며 급진적인 개혁정책을 시행했으나, 훈구 세력의 반발을 사서 결국 죽음을 당했습니다.
20세 때 김종직의 학통을 이은 김굉필의 문하에서 가장 촉망받는 청년학자로서 사림파의 영수가 되었습니다. 조광조의 정치관은 유교를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아 왕도정치를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왕도정치의 구체적 실현방법으로 왕이나 관직에 있는 자들이 몸소 도학을 실천궁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을 지치주의·도학정치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훈구파의 반발을 샀고, 모략에 의해 사사되는 불운을 격게됩니다.▲
1510년(중종 5)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한 조광조는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합니다. 1515년(중종 10) 가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적·감찰·예조좌랑을 역임하게 되었고, 이 때부터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유교로써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합니다.
당시는 연산군이 정치와 사회를 혼란에 빠뜨린 직후로 정치적 분위기를 새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 시대적 추세였고, 중종은 조광조의 정치사상을 바탕으로 이상정치를 실현하고자 했습니다. 조광조의 정치관은 유교를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아 왕도정치를 실현해야 한다는 것으나 쉬지 않고 계속된 급진적 개혁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중종은 훈구파의 탄핵을 받아들여 1519년 조광조·김식·김구·김정 등을 투옥하고 이어 사사(賜死)의 명을 내립니다.
그러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변호로 일단 사형이 면제되어 능주(綾州)에 유배되었으나 그후 훈구파의 김전(金詮)·남곤·이유청(李惟淸)이 3정승에 임명되고 조광조는 그해 12월에 사사되었습니다. 이는 기묘년에 이루어진 일이라 하여 기묘사화라고 합니다.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사류들이 기성세력인 훈구파를 축출, 새로운 정치질서를 이루려던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고 이들의 실패 원인은 그들이 대부분 젊고 또 정치적 경륜도 짧은 데다가 개혁을 급진적이고 너무 과격하게 이루려다가 노련한 훈구세력의 반발을 샀기 때문으로 평가됩니다.▲
심곡서원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었으며, 서원 서쪽 담장 밖에는 조광조가 직접 심었다고 전해지는 수령 500년 정도 된 느티나무가 경기도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고 느티나무 앞에는 연당이 있습니다. 국도 43호선의 동쪽에 형성된 서원말 뒤쪽 야산의 서향에 자리하고 있으며 심곡서원 뒤쪽에는 임야의 수목이 에워싸고 있었으나 근래에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어 경관이 훼손되었습니다.▲
심곡서원은 경사지에 홍살문·외삼문·강당·내삼문·사당을 잇는 중심축을 구성하여 전학후묘(前學後廟) 형식으로 배치됩니다. 경내의 건물로는 사우(祠宇)·일소당(日昭堂)·장서각(藏書閣)·내삼문(內三門)·외삼문(外三門) 등이 있고 외삼문과 내삼문은 솟을삼문 형식입니다. 외삼문의 가운데 칸 전면에는 ‘심곡서원(深谷書院)’이라 쓴 현판을 걸었습니다.
강당인 일소당은 전면 3칸, 측면 3칸의 익공계 팔작지붕 건물로 처마는 부연을 단 겹처마로 되어 있고 기둥에는 약한 흘림을 두었으며, 기둥머리에는 간결한 형태의 익공을 구성하였습니다. 벽체는 각 칸마다 목판벽(木板壁)과 판자문비(板子門扉)를 달아 사면을 개방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강당은 원내의 여러 행사 및 유림의 회합과 학문의 강론 장소로 사용되었고 강당 북동쪽에는 장서각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장서각은 전면 3칸, 측면 2칸으로 맞배지붕 건물이며 외벌대 기단 위에 방형 초석을 놓고 겹처마를 구성하였습니다. 전면 어칸에는 판문을 달고 문인방 위에 ‘藏書閣(장서각)’이라는 현판을 걸었고 좌우 툇간에는 중방 이하를 심벽으로 막고 상부에는 창문을 달았습니다.
장서각 맞은편에는 고직사가 있어 향사를 준비하거나 배향할 때 참례자들이 대기하는 장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당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 맞배지붕 건물이며 전면에는 툇간을 두어 개방하였습니다.▲
조광조 등 신진사류들의 도학정치사상을 바탕으로 한 급진적 개혁정책은 연산군 이후의 혼란을 극복하고, 요순시대(堯舜時代)와 같은 이상정치를 실현함으로써 국가의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실행방법이 급진적인 것이어서 왕권을 배경으로 한 훈구세력의 반발을 샀고, 결국 개혁정책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의 도학정신은 후세에 계승되어 이황(李滉)·이이(李珥) 등의 유학자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사림에게는 정신적인 표상이 되었으며, 한국 유학의 기본적인 성격을 형성하여 선조초에 신원(伸寃)되어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문묘에 배향되었습니다. 시대적인 상황이 급진적으로밖에 개혁을 할 수가 없었던 걸까요? 신진세력들의 개혁은 결국 현실과의 융합이 이루어지지 않아 이상으로 남을 수 밖에 없는 결과를 낳게 합니다. 옳다고 해도 무리하게 밀어부치면 그만큼 반발 또한 거세진다는 교훈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적용되어야 할 사례가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상기 팸투어는 여행의情답 투어용인 문화관광 농촌관광 특산물 먹거리를 홍보 하기 위하여 경기도 용인시청에서 초청 진행하는 팸투어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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