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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산여행]절 앞산의 금광에서 금을 캐어 불상을 주조하였다는 사찰 금산 보석사
    한국의 사찰/충청 2012. 6. 7. 06:30

     

     

     

     

     

     

     

     

     

     

     

    조계종 제6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인 금산 보석사는 충남 금산군 남이면 석동리 진악산 남동쪽에 자리잡고 있는 사찰입니다.  지금은 말사로 있지만 일제 강점기에는 31본산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였던 보석사는 강원이 있어 많은 학승을 배출하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그 당시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소박한 규모로 남아 있지만 당시에는 꽤 웅장한 사찰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보석사는 조선시대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위기에 빠지자 승병을 조직하여 맞써 싸우던 곳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이때 불타버린 절을 고종때 명성황후가 중창하였다고 합니다.  신라 헌강왕 때인 886년 조구대사에 의해 세워진 사찰로 천연기념물 제365호로 지정된 은행나무와 유형문화재 제143호인 대웅전, 문화재자료 제29호인 의선각이 있고 그외 등운선원, 기허당, 산신각, 법종루, 일주문, 요사채, 주지실 등이 있습니다.

     

     

     

     

    항상 그러하듯이 사찰로 들어가는 길은 너무나도 아름답습니다.

    이곳 보석사 역시 일주문을 지나 사찰로 향하는 길이 전나무숲으로 되어 있어

    신록이 우거진 숲길을 걸어가는 기분이 너무나도 즐겁습니다.

     

     

     

     

    사찰로 들어가는 길목에 우람하게 서 있는 은행나무가 보입니다.

    이 나무가 보석사에서 자랑하는 천년의 세월을 훌쩍넘은 은행나무가 서 있습니다.

    천연기념물 제365호이기도 한 이 은행나무는 조구대사가 이 절을 창건할 당시 다섯제자들과 함께

    육바라밀을 상징하는 여섯 그루의 소나무를 심었다고 하며 이 은행나무가 한그루로 성장하였고

    오래된 나무의 전설이 그러하듯이 이 은행나무도 나라에 변고나 큰 일이 일어날 때

    어김없이 소리내어 울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석사로 향하는 길은 두 갈래길로 나 있습니다.  범종루를 통해 들어가는 길과 목교를 넘어 바로 절 마당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는데 저는 범종루를 통해 들어가는 길을

    선택합니다. 뭐 어느곳으로 가도 상관이 없습니다..그저 발길이 가는대로 움직이시면 됩니다.

     

     

     

     

    보석사라고 적혀 있는 2층으로 된 누각을 통해 절 바당으로 진입합니다.  보석사에는 범종이 유명하다고 하는데 이곳 범종루에 있는 종이 아니라 이 보다는 작은 동종으로

    지금은 이곳에 없고 안심사에 있다고 합니다. 청동으로 제작되었으며 높이 95cm 하부 너비 63cm 크기라고 합니다.  종의 상부는 용모양의 고리와 1개의 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상면 원형(圓形) 구획 내에 범자(梵字)를 배치하였고 종신은 3분되어 상부에는 상하 2조의 범자가 배치되어 있고, 중간에는 당초문 내에 9개의 종유(鍾乳)와 보살입상이 교대로 배치되어 있답니다.  하부에는 제작년대와 화주명이 배치되어 있다. 그 가운데 ‘乾隆二十五年庚辰四月日高山大芚山安心寺改鑄鍾重一百七十斤’이라는 명문으로 보아 이 종은 1760년(영조 30)에 제작되었고, 그 무게는 170근임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또한 화주명을 통하여 경상도에서도 화주로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고, 전체적으로 도식화된 느낌을 주고 있으나 제작년대가 분명한 조선 초기의 종으로서, 보석사의 역사를 보완해주는 귀중한 자료로 판단된다고 합니다.

     

     

     

    범종루를 통해 들어가면 가장 먼저 보이는 곳이 바로 등운선원입니다. 이곳은 스님들이 참선하시는 곳으로 맞배지붕을 하고 정면 5칸 측면 1칸으로 구성되어져 있습니다.

     

     

     

     

    좌측으로 돌아보니 요사(의선각)너머로 대웅전이 보입니다.

    뒤에서 보면 요사는 1채의 일자형 건물로 보이는데 돌아가서 앞에서 보면 ㄴ자형식의 건물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보석사 가람 안으로 들어서서 몇 계단을 올라가야 있는 대웅전은 정면3칸 측면3칸의 집입니다. 맞배지붕이며 다포계 양식이며, 지붕의 양측면 끝에는 풍판이 달려있습니다. 자연석 막돌로 높은 축대를 쌓아 지형을 고르게 다진 뒤에 낮은 기단을 축조하고 그 위에 다음어지지 않은 화강암으로 된 주춧돌을 놓았습니다. 자연석의 주춧돌위에는 돋음주좌없이 원통형기둥과 배흘림기둥을 올렸고, 전각 건물전면의 창호는 띠분합문인데 중앙의 어간에는 사분합문으로 양측전면창호는 삼분합문으로 달았습니다.

     

    대웅전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1599년 삼인(三印)스님이 중창하였으며 1628년 무진년(인조 6년) 인해(印海)스님이 중수했다고 전해집니다. 조선시대 후기에 지어진 대웅전은 1993년에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4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다포식 건물인 대웅전의 공포와 공포사이의 벽에는 화불을 그려 넣었으며 전각 측면의 중인방과 상인방사이의 벽에도 고승이야기 등 불도를 닦는 선승들의 이야기가 벽화로 그려져 있습니다. 법당내부 들보에도 용이 된 물고기 어룡도와 현무가 그려져 있고,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의 규모로서, 지붕은 맞배지붕에 다포계 양식이며, 양측면에 방풍장(防風障)이 있습니다. 

     

     

     

     

    대웅전 내부 불단 중앙에 석가여래좌상을 봉안했으며 좌우협시로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두었습니다. 석가여래좌상은 목조로 조상되었으며 결가부좌를 했으며 항마촉지인을 결하고 있습니다.  좌협시보살인 문수보살좌상은 머리에는 금속제로 만들어진 화염문의 높은 보관을 쓰고 있습니다.  우협시 보살은 보현보살좌상입니다. 이 역시 화려한 금속제의 높은 보관을 쓰고 있습니다.  왼쪽 팔을 어깨 가까이에 들어 길게 구부러진 연봉을 잡고 있습니다.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마주하여 대칭적으로 수인을 취하고 있고, 삼존불은 좌고가 100cm가 넘는 대형 목조삼존불상으로 전체적으로 모두 원만한 상호를 지녔습니다. 대웅전의 삼존불은 임진왜란 이후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영규대사의 진영을 봉안해두었다고 해서 진영각은 기허당으로도 불리우는데, 진영각은 조금 높은 기단위에 낮게 건물을 세웠습니다. 대웅전과의 거리와 위계를 고려해서 건물의 높이와 규모를 배치했다고 보여집니다.

     

     

     

     

    전각 안에는 기허당 영규스님의 진영을 중앙에 모셔놓았으며 보석사에서 수도 정진한 선사들의 위패를 봉안해 두었답니다. 위패가 봉안된 10명의 선사들은 허주당 덕진, 응허당 포문, 덕암당 영휘, 기허당, 무경 대선사, 보봉(寶峰)대선사, 순화(淳化)대선사, 대응당 대선사, 등운당 대선사, 진속쌍융(眞俗雙融) 보명거사 유천혁이라고 합니다.

     

     

     

     

    기허당 서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옆으로 걸어가면 나무 계단이 나오는데, 그 계단을 오르면 조금 더 높은 곳에 위치한 산신각에 이릅니다. 산신각은 정면1칸 측면1칸 집으로 맞배지붕이며, 측면과 정면의 너비가 같은 규모로 보이는데, 밖에서 보면 맞배지붕의 넓은 풍판으로 인해 측면이 더 넓어 보입니다. 비탈길이라 축대를 이용해 대지를 고르게 한 뒤 화강암으로 기단을 다지고 건물을 세웠다고 합니다.

     

     

     

    전각 안에는 산신이 그려져있는 불화와 북극성의 일곱명의 여래가 그려진 칠성탱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산신각에서 바라보는 보석사경내 풍경입니다.  대웅전과 진영각의 뒷부분 너머로 의선각이 보입니다.

     

     

     

     

    대웅전 앞에 있는 의선각은 현재 요사채로 사용 중이라고 합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의병승장 영규대사가 머물며 수도 정진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고, 의선각(毅禪閣)이라는 현판은 창녕위 김병주의 글씨라고 합니다.

    영규대사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승병을 모집하고 조헌선생의 의병과 함께 금산의 왜적을 격퇴하였으며 700의사와 함께 1592년8월 금산벌싸움에서 전사했다고 합니다. 영규대사는 용맹과 담력이 출중하였으며 싸움마다 크게 공을 세웠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현재 요사채로 사용하고 있는 의선각에는 해강 김규진이 쓴 보석사 사액이 걸려있고, 문화재자료 제2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보석사는 산지형 사찰인데도 축대를 쌓아서 땅을 고르게 다지고 전각을 배치하였습니다. 절마당과 같은 지대에는 등운선원, 의선각, 적묵당 등 요사채가 남향으로 연결되어 들어서 있고 대웅전과 진영각, 산신각이 절마당의 지대보다 위쪽에 사선형태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정남향의 대웅전 서쪽 좌측으로 나란히 하여 기허당 영규대사의 진영이 있는 진영각이 있고, 진영각 조금 더 위쪽 좌측에 산신각이 있습니다. 

     

     

     

     

    이제 반대편으로 목교를 건너 은행나무가 있는 길로 돌아갑니다.

    비가 오면 물이 흐르려나요?  다리를 건너지만 그 밑으로는 물이 흐르고 있지는 않습니다.

    물론 불교에서 상징하는 다리의 의미는 우리가 생각하는 다리하고는 다르지만

    그래도 흐르는 물이 있었으면 좋았겠다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다시 무성한 숲길을 따라 돌아갑니다.

    숲 사이로 살며시 비치는 햇살이 너무나도 좋습니다.

    신록이 우거진 틈으로 내려오는 햇살들이 숲길의 푸르름을 더욱 강조합니다.

    햇살에 의해 보여지는 명암 자체가 그 길을 걸어가는 여행자의 마음을 즐겁게 합니다.

     

     

     

     

     

    보석사를 먼저 볼려는 마음에 그냥 지나쳤던 의병승장비각이 눈에 들어옵니다.  비각의 안에는 높이 4m정도 되는 화강석재로 만들어진 의병승장비가 세워져 있으며 비각 앞에는 영규대사에 대한 국역비가 건립되어 있습니다. 의병승장비는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왜군을 물리치기 위해 승병을 조직하여 맞서 싸우다가 순절한 영규대사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서 세운 비석입니다. 비석의 앞면에는 의병승장(義兵僧將)이라고 새겨져있고 뒷면에는 비의 건립연대와 영규대사의 생애와 활동상을 알려주는 내용의 비문이 적혀 있습니다.  1839년 금산군수였던 조최영에 의해 세워진 비석은 일제강점기에 비각이 헐리고 비석의 자획이 훼손되는 등 수난을 겪기도 했다고 합니다. 1984년에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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