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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해여행] 조선시대(태조4년) 최초로 국행수륙대재가 설행되었던 두타산 삼화사
    한국의 사찰/강원 2012. 3. 21. 07:00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건국과정에서 희생된 영혼을 위무하고 친 고려성향의 세력들을 포옹하여 잭성들과 소통,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동해의 삼화사, 강화도의 관음굴, 거제도의 견암사에서 국행수륙재재를 실행하였는데 이것이 조선시대 수륙재의 시작이라 합니다.

     

    삼화사 국행수륙대재는 하늘과 땅(天地), 죽은 자와 산 자(冥陽), 사성과 육범(水陸)의 모든 존재가 서로 소통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이 배경에는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민왕과 두 아들이 삼척에서 교살되었기 때문이며, 이들 왕씨일가의 영혼을 달래어 민심을 수습하고 백성들과 소통, 화합하기 위해

    매년 봄과 가을에 왕실에서 주관하여 실행된 의례입니다. 

     

    삼화사에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天地冥陽水陸齋儀纂要)가 전해지고 있으며 이는 삼화사국행수륙대재 의례서이며 수륙대재가 삼화사에서 전승되어 온

    역사적 배경과 함께 서지학적 중요성이 인정되어 강원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천하의 절경을 품안에 안고있는 두타산,  무릉계곡의 절경에 넋을 잃고 가다보면 많은 시인과 묵객이 노닐다 간 무릉반석이 나오고 그 반석 길 한쪽에

    세워진 일주문을 지나 다리를 건너면 바로 삼화사가 눈앞에 보입니다.

     

     

     

     

     

    다리를 건너 계속 이어진 길은 용추폭포로 가는 길로 이어져 있으며 그 길목에 바로 삼화사가 있는 것 입니다.

     

     

     

     

    신라 선덕여왕 11년(642년) 자장율사가 두타산에 절을 짓고 흑연대라 하였다가 864년(신라 경문왕 4 년) 범일국사가 절을 개축하여 삼공암이라 하였으며,

    고려 태조 때 삼화사라고 개칭하였습니다. 그 후 여러 차례 소실· 중건하였으며, 1997년 쌍용채광권 내에 편입됨으로 인해 옛날 중대사가 있었던 곳으로

    이전, 현재에 이르렀습니다. 1988년 전통사찰로 지정된 이 절은 사찰 내에 도 지정 문화재인 삼화사철불 및 삼층석탑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삼화사는 1,300여 년의 긴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신라 선덕여왕 11년(642) 자장율사가 이곳 두타산에 이르러 절을 짓고 흑연대라 한 것이

    그 효시라고 하지만, 경문왕 4년(864)에 구산선문 중 사굴산파의 개조인 범일국사가 '삼공정'에다 삼공암을 지었을 때부터 뚜렷한 내력을 갖게 됩니다.

    그 뒤 고려 태조 때에 와서 삼화사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고려를 세운 왕건이 삼공암에서 후삼국 통일을 빌었으며, 삼화사라는 이름은

    '세 나라를 하나로 화합시킨 영험한 절' 이라는 뜻입니다.

     

     

     

     

     

    천왕문을 지나 경내에 들어서면 바로 눈앞에 삼층석탑과 대웅전인 적광전이 보입니다. 삼화사의 중심 법당인 적광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계(多包系) 팔작지붕 건물입니다. 1907년 왜구의 방화로 불에 타 1908년에 다시 세운 건물로서 1977년의 이건 때 그대로 옮겨왔으며, 얼마 전까지 대웅전으로 사용되다가 보물 제1292호로 지정된 철조노사나불좌상(鐵造盧舍那佛坐像)을 봉안하면서 적광전(寂光殿)으로 편액(扁額)을 내걸었답니다.

     

     

     

     

    편액과 주련은 탄허스님의 친필을 묘사한것이라고 전해집니다. 주련은 자장율사의 불탑계라고 합니다.

    적광전은 화엄을 중시하는 선종사찰의 하나로 진리의 빛이 가득한 적정의 세계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삼화사삼층석탑(보물제1277호)는 통일신라시대때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기단부와 상륜부가 손상이 심하고 나머지는 대체로 원형을 알아보는데

    지장이 없어 동해안 지방에서는 보기드문 수작으로 평가되어 예술적이고 문화재적인 가치를 인정받았다고 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1990년 5월 강원도 문화재자료 113호로 지정되었다가 1997년 6월 이탑을 이전하는 과정에서 사리함과 소탑이 발견됨으로써 다시 보물로

    승격되었다고 합니다.

     

     

     

     

    철조노사나좌불(보물제1292호) 삼화사 철불은 처음에는 창건설화에도 나오듯이 약사불로 알려져 왔었습니다. 신라말에서 고려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삼화사 개창초기 이후에 조성되었다고 볼 수 있답니다. 이 철불은 발견당시에는 하반신이 완전 상실되었고, 두손도 없었으나 상체, 특히

    안면의 조각은 매우 우수하였다고 합니다.  왼손은 완전히 파손되어 형태를 알 수 없고 오른손은 수평을 들었음이 분명하나 손목위치에서 부러져

    없어졌다고 합니다. 이 불상이 좌상인지 입상인지 분명히 밝힐 수 없지만 현존 최하단부 우측이 앞으로 꺽이면서 연장되 있는 점과 불상의 일반적인 자세로

    보아 좌상으로 짐작만 될뿐이라고 합니다.  훼손이 심했던 이유는 조선중기 이후로 여러차례 화재와 인위적인 훼손에 의한 것으로 한때는 골돌품 수집상에게

    팔려갈 뻔 한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1997년 삼화사 주지 자광 원행화상의 원력으로 복원불사가 추진되어 오늘날의 모습으로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불상의 복원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불상배면에 돋음새김으로 남아 있는 명문이었답니다.

    이명문은 1행에 17자씩 세로 10행에 걸쳐 남아 있었는데, 이중 판독이 가능한 것은 140자에 불과하지만 이로인해 불상의 비밀이 몇가지 밝혀졌답니다.

    제작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 철불로 인정되어 왔고 약사불로 알려져 왔던 이 철불이 명문이 이두문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빠르게는 7세기, 늦게 잡아도

    하한선은 9세기말로 추정되고 신라하대에 철불들에서 나타나는 몇가지 공통적인 특징이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나발 위에 솟은 육계라든가 원만한 상호, 뚜렷한 심도와 통견법등은 보림사 칠불이나 도피안사 철볼과 흡사하고 명문이 나타난 것도 신라철불로서의

    증거가 되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불상의 존명이 밝혀진 것이라고 합니다. 그동안 약사불로 알고 있었던 이 철불의 존명이 '노사나불(盧舍那佛)' 이라는 사실이

    명기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신라말 고려초기 불교사상적 동향을 알아내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합니다.

    라말려초(羅末麗初)의 시기의 철불상 존명이 대개 비로자나불이 주류를 이뤘고 이는 나말려초의 불교사상계가 구산선문이 형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화엄교학적인 분위기가 강하게 남아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라고 합니다.

     

     

     

     

    삼화사 경우처럼 신라에 이미 선종인 사굴산문에 편입된 사찰에서 노사나불이 발견되고 있는 것은 그 이전에 화엄교학이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새로 복원된 불상의 좌대는 철원 도피안사 철불의 좌대를 모형으로 제작하여 1997년 10월 28일 준공한

    적광전에 안치셔켰고 법당의 편액은 당연히 대웅전이 아니라 적광전으로 걸었다고 합니다.

     

     

     

     

     

    적광전 옆에는 '중생을 구원하는 것이 우선이요 그 다음이 나의성불' 이라고 하시는 석장과 여의보주를 든 지장보살입상이 팔각의 신장상이 새겨진

    기단위에 연화대좌위에 서 계십니다. 1992년에 조성되었다고 합니다. 보통 명부전에 모셔져 있는데 삼화사에서는 이렇듯 야외에 모셔져 있습니다.

     

     

     

     

     

     

    약사전은 1998년에 신축하였으며 정면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약사여래부처님과 협시불인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모시고 있습니다.

    중생을 모든 변고에서 구하고 무명의 고질까지도 치유하여 깨달음을 인도하는 약사유리광여래로 보통은 약사여래, 또는 약사불로 부르며 경전에는

    병을 고쳐주는 위대한 부처란 뜻으로 대의왕불 이라고도 불리고 있습니다. 아마 약사불로 알려졌던 철불이 노사나불로 확인되면서 이곳에 약사전을 지어

    약사삼불을 모신것이 아닌가 추측을 합니다.  약사삼불의 개창 설화 등 삼화사의 약사신앙은 오래전부터 유명했기 때문입니다.

     

     

     

     

     

    칠성당은 독성 나반존자, 산신과 칠성님을 함께 모신 곳이며, 토착신앙과 불교가 융화되는 있음을 나타냅니다.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인 극락전은 적광전의 왼편(서편)에 위치하여 동향해 있습니다.

    최근에 지어진 이 극락전은 옛 대웅전(현재의 적광전)에 모셨던 불상과 불화들을 그대로 옮겨 봉안하고 있습니다. 법당의 중앙에 모신 아미타삼존불상은

    1908년에 대웅전 건립과 함께 봉안된 불상이며, 석조(石造)로 조성되었습니다.

     

    중앙의 본존불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아미타수인(阿彌陀手印)을 취한 채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고, 좌우의 협시보살들은 연꽃가지를 들고 앉아 있는

    모습인데 우측 대세지보살의 보관(寶冠)에는 정병(淨甁)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삼존불상의 뒤로는 최근에 조성된 아미타후불탱화가 걸려 있으며,

    법당 좌ㆍ우측에는 각각 아미타탱과 감로탱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이 중 좌ㆍ우측에 걸려 있는 두 점의 불화는 아미타삼존불상과 함께 대웅전에 봉안되었다가 옮겨온 것으로 화기를 통해

    아미타탱은 1989년, 감로탱과 1979년에 각각 조성되었답니다.

     

     

     

     

     

     

     

    봄이 오는 길목 따사한 햇살이 기분좋은 태조와 인연이 깊은  두타산 삼화사에서  서 있습니다.

    삼국을 통일하고 세나라를 화합시킨 영험한 절이라며 삼화사라고 명명한 고려 태조 왕건과 또한 그가 세운 고려의 마지막 왕 이었던 공민왕의 영혼을

    달래려고 이곳에서 국행수륙대재를 설행했던 조선 태조 이성계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 두 태조들 모두 민심을 수습하고 서로 소통하고 화합하고자 했던 곳.

    이곳 삼화사는 건국의 역사 한가운데 그 이름이 존재하였던 것 이었습니다.

     

     

     

     

     

    지금은 고려의 태조 왕건도 조선의 태조 이성계도 이미 세월이 흘러 역사의 인물로 한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을 뿐 그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이곳 삼화사에는 세월의 흔적만 말해주는 돌담에 담쟁이들이 무성할 뿐입니다.  하지만 건국을 하고 민심을 수습하고자 하는  그들의 발자취를

    기억할 수가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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